2015년 4월 13일에 www.ize.co.kr에 강명석 씨가 쓴 <장동민, 사람부터 됩시다> 칼럼을 읽고 '욱'하고 말았습니다.



그 칼럼에서 장동민을 비판하기 위해 '야성에 가까운 본능에서, 약자에 대한 시선에 대해 전혀 사회화 되지 않은 정글의 법칙에서 나온 것이다.'라며 유인원의 리더로 문명을 만든 시저의 본성을 연결시킨 게 무리수였다고 봅니다.

읽는 순간 섹시똑똑감성충만의 시저를! 부들부들! 


덕력이 부족하고 덕심이 얕아 캐릭터를 잘 파는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혹성탈출>의 시저와 <화이트칼라>의 닐 카프리 만큼은 잘못 건들면 부들부들입니다. 부들. 


시저 못생겼어. 침팬지짐승! 막막 이래도 상관없지만 폭력적이라거나 인간다운 면모를 가진 동물 이렇게 말하는 거 정말 싫더군요. 시저는 시저입니다. 인간다움에 대해 인간을 과신하는 표현은 싫습니다. 인간다움이 문명적이고 선하고 지적이라는 근거만큼이나 그 반대도 넘치는데 시저에게 인간답다라고 하는 것도 모욕입니다. 그런 것도 모자라.. 장동민 같은 후레자식과 비교되다니!!!!


시저만한 인간 남성을 찾는 게 오히려 미션임파서블인지도 모르는 인간 세상에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싫어한다'로 장동민과 비교되어야 하다니.. 시저가문의 수치이자 치욕입니다. 


시저는 우성 수컷입니다. 자신의 힘을 약자에게 과시하지 않습니다. 폭력적인 것을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신체적 능력이 인간에 비해 뛰어난 것 뿐입니다. 시저가 분노를 드러내고 그 힘을 쓰는 순간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는 인내하고 배려합니다. 아이와 아내를 사랑하고 동료를 지킵니다. 장동민을 혹성탈출 시저와 비교한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이 시저를 두려워한 건 그가 야만적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보다 우월한 힘을 가져서였습니다. 그 자체가 두려운 사람들이 시저의 뛰어난 공감 능력과 리더십 그리고 포용력을 보지 않으려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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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주변과 그 너머의 일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쾌락적인 요소보다 끔찍한 사건들과 마주할 때가 더 많다. 

그로인해 존재하는 고민들을 수치심이나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폐단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게 섹스로 인한 문제다. 

남성의 폭력도 그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다.

(남성의 여성혐오 범죄나 데이트 강간, 이별 살해 등등)


약자가 빼앗길 수 있는 자기 몸의 주체성이나 통제력도 

섹스와 연결되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혐오하게 될 일들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섹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음란과 야함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름과 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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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 내게 섹스는 거절과 동의어였다. 남자들은 나와 자고 싶어했다. 내가 가진 성적 매력,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 시기에 내 남자들이 섹스를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짐짓 얌전하게 행동을 포장했지만 그런 충동에 흔들리는 눈빛은 쉽게 읽어졌다. 


나는 혼전순결주의도 아니었고, 섹스 자체에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굳이 그 남자들과 자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분명했기 때문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제안받는 쪽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드디어 내가 자고 싶은' 남자를 만났을 때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그때의 고민과 시행착오가 글을 쓰게 만들었던 동력이었고 그 덕에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었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답이 없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연애와 관련된 조언을 써야하는 지면을 맡게 되면 확신의 어투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조심스럽다. 그래도 써야할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주저하게 만들고 쓰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늘 그것과 싸움을 한다. 섹스를 거절하는 일은 쉽지만 좋은 섹스를 위해 해야할 일들은 수월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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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남성의 성역할은 과도하고 책임감이 많이 따른다고 여기기에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하고 하는 소리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성들이 

성적 호기심의 영역이나 성적 폭력성에 한해서는 '남자는'이라는 소리를 하는 걸 볼 때가 있다. 


자기편의적으로 '남자는 다 그래'라고 하면, 남자니까 그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남자들까지 

싸잡아 욕먹이는 건데 마음 속에서 그런 문제로 싸워보지 않은 남자들은 한 명도 없지 않아서 

그런 말에 넓은 이해심이 작동하는 건가. '남자는 다 그래'라는 말에 불쾌를 표해야 할 것 같은데...


'남자는 다 그래'라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는 남자들과 뭘 도모해야하지?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도 상처받지 않게? (게다가 여성이 거절할 때 조심스러운 것은 그 개새끼가 돌변해서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한거지 본격 쌍년짓 하겠다는 게 아니거늘) 내부 반성을 왜 외부로 돌리는 건지?








상대가 가진 원초적인 폭력성이 섹시하다고 느낄 때는 그로인해 내가 다칠 일은 없다는 확신부터 자리잡아야 한다. 질투로 울컥해 주먹으로 쳐 문짝을 망가뜨려놓고는 섹스 도중에 목을 졸라달라는 말에 덜컥 겁을 먹는 남자의 귀여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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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여자의 도발을 멋있는 행위라고 칭송하지만 실은 쉽게 섹스로 가는 방법이라 좋은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주체성을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먼저 나설 정도로 자신이 근사하다는 것에 대한 도취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남자가 먼저 제스처를 취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내가 상대를 '원'한다면 먼저 도발할 수도 있지. 자기 맘도 모르면서 섹시함 코스프레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여자가 도발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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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점에 와서 더이상 친밀함에 대해 기대감을 품지 않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돌아서는 사람의 등을 보는 게 무서워 내가 먼저 등을 돌릴 타이밍만 기다리는 비겁한 사람이 된 듯도 하다. 물론 사랑 자체를 냉소하진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나를 변화시키는 그 순간은 언제나 가증스러우면서도 즐겁다. 그러나 감정의 노동강도가 심한 사랑보다는 우정의 영역에서, 에로틱한 우정의 정도로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더 바라게 되는 것 같다. 사그라들 열정보다는 지속적인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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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시애틀


Why Don't Domestic Violence Victims Leave?

- Leslie Morgan Steiner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






















 

몇 년 전 SNS에서 알게 된 몇 명의 친구들로 이뤄진 모임에 나갔을 때 그 중 한 명이 “oo님이 현정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알고 싶어요?”라고 되물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알고 있다는 듯, 그것이 내게 어떤 깊은 내상이라도 입힐 수 있는 사실인양. “, 말해보세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40대 여성 유저에게 내가 쓰는 글이 불편함을 준다는 것. 사적이고 은밀해야할 성적 경험을 풀어놓는 것이 얼마나 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공적 루트가 아니라 정제되고 걸러진 글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관계나 나의 상태에 대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나의 음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수용하기 힘든 주체성이 그녀들을 불편하게 했다. 결혼과 육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아서, 그러면서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진을 올리면서 소위 여성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공격적이지 않게 말하는 법으로 글을 쓰지 않아서가 그 이유였다. 150, 태그까지 포함해서 300자 정도의 글로 설명되지 않는 맥락을 툭 던져놓기 일쑤였고 나도 내가 그런 글쓰기를 하는 것이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해명이나 풀어쓰기 같은 걸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 글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고 남자들에게는 일종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도 있었다. 내게도 실험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쓰고 말하는 것이 여성적 가치를 폄하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성혐오가 두드러졌다면 모를까.

 

그 무렵 나는 내가 하는 일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가 성적 대상이 되는 걸 감수해야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즐기기 위한 포지션도 취해보고 혹은 위악적으로 그걸 이용하기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내게 어떤 만족감이나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모순의 간극만 넓혔다.

 

내가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남자를 못지않게 누리자’,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갖자에 있었지만 내 성을 팔고 있는 건 아닌가, 여성이 성적 경험을 누설하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남성에 대한 회의감만 깊어지고 있었고 사랑 자체에 냉소하게 되었고 동시에 주체적이지 못한 여성적 태도에 대해서도 종종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점에서 내가 과연 올바른가? 내가 여성을 위해 이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여성의 권리를, 양성평등을 바란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어떤 확신 같은 걸 가지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럴 때 페미니스트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기도 하고 각종 진보적 운동을 해오던 친구 D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내왔지만 한 번도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각 같은 걸로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의 균형을 잡게 도와주는 조언, 그리고 내가 공식적으로 작성하는 원고에서 페미니스트로 의식이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자신의 삶 자체에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사회적으로 연대를 이루고 활동을 하는 게 아닌데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여성성을 이용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해도 될까? 하는 고민도 나를 휘감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대학 입학 후 얼마되지 않아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강하게 드러내며 내게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길 바랐던 선배의 훈수가그리고 그 사람이 그 뒤에 보여준 자기 배반적 행보와 인간적 무매력이 나로하여금 페미니스트라는 동류로 묶이는 걸 질색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대학 내내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라며 교묘하게 그리고 비겁하게 말을 돌렸다. 자라오면서 양성평등에 대한 갈증을 느껴왔으면서도 리사 터틀이 말하는 "성차별이 존재하고 여성이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페미니즘의 필요성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로 인식되기 싫어하는 경향. 페미니스트라는 표지에 의해 사납고 경직되고 유머 없고 교조적이며 정치적 올바람에 사로잡힌 여성이자 남성혐오적인 레즈비언 이미지로 비춰질까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나는 나고 자라오면서 해온 모든 행동과 사고들의 근간에는 페미니즘이 있었다. - 그 얘기부터 풀어쓸까 하다 다들 그런 서사를 가지고 있을텐데 싶어서 생략, 언젠가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 사회적으로 여성이 우월하다거나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동등함을 바랐다. 내 삶과 나 자신 그 자체가 페미니즘의 요구였다. 그럼에도 기질적 오만함이나 시행착오 속에서 나의 정체에 대해서 명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내게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안겨준 선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어떤 선언이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그쳐서 깨우쳐질 의식도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기까지 주변의 자극 없이 혼자 눈을 뜨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준 친구 D가 있었고 내가 하는 일로 인해 고민을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계기들 덕분에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D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움직임이 주저하고 있던 누군가에게 그렇다면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동지의식을 갖게 만들 수 있다면 그간 취해왔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를 폐기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타쿠미의 친절한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무 살 때부터 10년간, 자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한 것의 딱 절반이 되는 시간 동안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그의 한국어 나이는 10살. 물론 서른의 사고로 걸러져 나오는 10살의 언어는 10살 남자아이의 언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소년같이 맑은 언어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그 언어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타쿠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이 언제나 쉽게 관철된다고 생각했다. 타쿠미가 이끌어낸 결론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상대의 선택에 대해서 안 돼요 혹은 싫어요라는 부정적인 표현은 하지 않으면서도 조타 지휘를 훌륭하게 해냈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유유하게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곤 했다.

 

"자에도 모자랄 적이 있고 치에도 넉넉할 적이 있다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무능력함에 질려 투정이라도 부릴 때면 타쿠미는 한국인들도 잘 쓰지 않는 속담으로 그 상황을 위로했고,  능청스럽게 단어를 지어내고, 가끔 섹스를 연상케하는 짓궂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태연한 얼굴로 그런 말을 했다. 생각없이 내뱉은 말인 게 분명한데 나는 그의 앞에서 쉽게 정색하고 크게 웃었다가 무너지길 반복했다. 나보다 한국말이 서툰 사람에게 한국어로 놀림 당하는 기분은 썩 좋진 않았다. 가끔 그와 헤어진 뒤 서로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보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의 말에 반응이 오고 맞받아칠 말들이 생각났다. 타쿠미와 있을 때는 농담의 깊이가 훅하고 들어왔다 금세 쑥 빠져버리지만 그가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가 쿡쿡 쑤셔 왔다. 타쿠미가 내뱉은 농담의 질이 나빴던 게 가장 큰 원인이고 그걸 냉정하게 받아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반복되도록 내버려둔 내 잘못도 컸다. 그렇다고 그에게 "야메떼!" 라고 말하기도 우스웠다.

 

타쿠미는 자신이 가진 언어보다 더 큰 사고를 했다.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지 못 했다. 오히려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세상을 규정하고 확장시켰다. 어렵지 않게 사람들을 그 세계로 끌어들였다. 타쿠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자신만만함이 있었다. '내겐 적이 없어'와 같은 태도. 하지만 그에겐 제대로 된 아군도 없었다. 친구들은 많았지만 타쿠미가 그들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울리는 것, 굳이 우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 시간을 함께 어울리면서 즐거울 수 있다면 타쿠미는 만족스러워했다.


소위 일본 사람들이 말하는 혼네(본심), 타쿠미의 본심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국민성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게 그 사람 특유의 진심을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앞에선 잘 감추고 뒤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정말 마음이 없는 사람. 언어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그랬다. 친절하지만 다정하진 않았다. 몸을 담그고 있다보며 미지근하게 식어서 갑자기 한기가 끼쳐오는 그런 언어를 사용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했을텐데 나는 타쿠미의 그런 점들을 속상해 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루는 아무렇지 않게 타쿠미가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듣다보니 예전에 한 번 들은 적 있었다. 팩트는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발화된 순간이 달라서인지 이야기가 가진 비극성이 짙게 느껴졌다. 낯선 한국에 와서 적응하는 동안의 고생스러움은 지나고보니 희극처럼 표현되었지만 그 당시의 타쿠미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잔했다. 하지만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공감을 하지도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능력을 쓰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여리고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제대로 느낄 수 없음을 감추기 위해 포즈를 취한 것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투영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은 애를 써야했다. 과장된 공감의 언어를 쓸 땐 오히려 관심이 전혀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타쿠미가 일본 어느 현에서 살았으며 며칠에 태어났으며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와 같은 사실 정보도 생각 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사실을 들은 적이 있었지라며 기억하는 것도 어떨 땐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곤 했다.



타쿠미는 그런 나의 망가진 일부분을 그냥 바라보았다. 고정되거나 응시하는 시선이 아닌 카메라로 어떤 장면을 담듯 ​판단하지 않고 보았다. 아니 본인 나름의 판단을 내렸겠지만 그걸 내게 들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만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에 도취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가 자신에게 매료된 한 여자를 지켜보고 관찰하는 것이 지금 그에게 새로운 유희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타쿠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받아들여준다.

 

 

우린 서로가 너무나 맞지 않고 의견 조율이 쉽지 않으며 나는 그에게 투정만 부리고 내 의견을 설득의 작업없이 관철시키려 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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