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이라 북적이는 기차 안에서 그녀는 미동 없이 울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가 옅은 울음을 삼켜버렸지만 그녀의 오른쪽 뺨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숨길 수 없었다. 옆자리의 낯선 사람일뿐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로 하여금 슬픔을 고요하게 꾹 누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그만 두었다. 애인과 헤어져서 그럴 것이라는 내가 바라는 답만 떠올랐고, 그러자 속절없이 실체도 없는 그 남자가 미워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울리는 건 같은 남자로서 용서가 되지 않았다. 동시에 그것이 나에게 기회가 되길 바라는 게 한심했다.

 

손수건을 찾으려는 듯 천으로 만든 가방을 뒤적이던 그녀는 갑자기 허둥거리며 가방 안의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파우치, 손거울, 휴대전화, 선글라스, 물티슈와 손수건이 나왔지만 그녀가 찾는 건 없는 듯 했다.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의 발밑을 살펴보더니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라며 자신이 나갈 공간을 요청한 그녀는 기차 통로에서 다시 한 번 좌석 바닥을 살펴보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 , 타인의 곤란함에서 음욕을 느끼다니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욕지거리를 스스로에게 내뱉었다. 그때 기차에서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차가 정차할 곳은 조그마한 간이역이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건 지갑이었다. 더 이상 어딘가로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듯 그녀는 선반에 올려놓은 작은 여행 가방을 내렸다. 그 순간 나역시 본능적으로 배낭을 둘러맸다. 그리고 안도했다. 그 간이역에서 내린 사람은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상심한 그녀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나도 함께 내렸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채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누군가와의 전화통화는 지나칠 정도로 담백했다. “나 지갑을 잃어버렸어. 도중에 내렸는데 데리러 올 수 있어?” 몇 통의 전화를 했지만 다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듯 했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제가 도와드릴까요?”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그 시선이 지긋해서 나는 관통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안심되는 목소리네요.”라고 말했고 살짝 웃었다. “우선 뭐 좀 먹을까요? 신경을 썼더니 머리도 아프고 허기지는군요.” 우리는 간이역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녀와 발맞춰 걸으면서 지도를 검색하니 한 1km 정도는 걸어야 했다. 그녀는 조금 전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답지 않게 아니 눈물을 흘렸던 여자답지 않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이 난 듯 발걸음을 옮겼다. 이래서 오스카 와일드가 ‘여자는 사랑받을 존재이지, 이해돼야 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한 것일까.

 

식당은 작고 허름했다. 그런 건 개의치 않는 듯 세 가지 밖에 없는 메뉴 중에서 그녀는 소머리국밥을 시켰다. 국물까지 싹 다 비웠다. “잘 먹죠? 뭔가 위기상황에선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느낌이랄까.” 배를 채우고 나오니 찌뿌드드하던 하늘은 좀 더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어디론가 들어가야겠어요.” 식당에 물어보니 민박집을 하나 알려주었고 그곳을 향하는 길에 억수같은 비가 갑자기 쏟아져 얇은 블라우스에 반바지 차림이던 그녀는 완전히 젖어버렸다.

 

방에 단둘이 남게 되자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며 옷에서도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빗물에 그녀의 눈물이 섞여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나는 그녀를 와락 안았다. 뺨을 맞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웃음소리가 멈췄다. 그녀는 죽은 새처럼 가만히 안겨있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은 찰라 그녀는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그녀의 몸에서는 관능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처절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또 그런 것이 날 빳빳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이번 여행에서 얻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 몸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으로 포장하자면 그러했다. 여행지에서 낯선 여자와의 난데없는 섹스를 꿈꾼 적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애초에 베푼 선의의 목적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내버려둘 순 없었다. 하지만 같이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품은 건 사실이었고 하늘은 역시,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젖어서 온 몸을 휘감고 있던 옷은 벗어버렸다. 체온이 낮아져 서로의 몸엔 닭살이 돋아있었지만 몸 구석구석을 차례대로 데워나갔다. “오늘 내가 겪은 불운을 봤죠? 그래도 나를 안고 싶어요?” 그 말은 어떤 주술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맨몸의 그녀를 다시 한 번 꼬옥 껴안았다.

 

그녀는 요를 두 겹으로 깔고 나를 눕혔다. 그리고 내 몸 위로 올라탔다. 낯선 것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 잘 짜인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요란하게 움직였고 허벅지로는 내 몸을 꾹 눌러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절정에 오른 그녀는 내 몸 위로 풀썩 쓰러졌고 이제 내 차례라는 듯이 반듯하게 누워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날이 올 때까지 잠들다 깨다를 반복하며 어둠 속에서 서로를 더듬어 빈틈을 채워나갔다. 그것만이 애초의 목적이었다는 듯이.

 

상행선 기차를 타고 그녀가 먼저 떠났다. 간이역에 홀로 남겨진 나는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어제와는 완전히 다르게 화창하게 맑아진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밤을 지새우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가 도달하려는 지점에 갈 수 있도록 나의 움직임이 바른 곳을 공략하고 있는지만 물어보았다. 그녀가 왜 울었는지는 완벽한 미스터리가 되었다. 혹여나 계좌이체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틀 뒤 확인한 통장에는 이름 대신 그날의 날짜가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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