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행자부, 가임기 여성을 위한 종마 서비스 제공

 

행정자치부가 야심차게 제안했던 저출산 극복 프로젝트가 여성비하적이라는 비판을 수용, 가임기 여성들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임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종마서비스를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종마 서비스요?

 

. 그렇습니다. 생소한 표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니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그 종마가 맞습니까? 그 뜻을 풀어서 설명해주시죠.

 

종마, 번식을 목적으로 사육하는 수컷 또는 암컷의 말을 뜻하는데요. 행정자치부가 이번에 제시한 서비스의 내용을 보면 가임기 여성이 이용하는 서비스이므로 종마의 의미에는 남성만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허허, 흥미로운 이름이군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지난 1229일 행정자치부는 저출산 극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가임기 여성의 인구수를 지역별로 표시한 지도를 게시하였습니다. ‘가임기여성인구수를 클릭하면 지역별로 가임기 여성 현황이 나타납니다. 행자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20~44살까지의 여성을 임의로 분류해 집계했습니다. 통계청의 자료를 활용해 제공한 것이라고 했지만 통계청은 가임기 여성의 범위를 15세에서 49세까지로 집계하고 있으며 통계청의 인구 및 출생 통계 내용을 살펴보아도 그 어디에도 가임기 여성 인구수는 없었습니다. 출처뿐만 아니라 사용처와 의도가 불분명한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가임기 여성의 수를 한자리 단위까지 세세하게 표기하였습니다. 이에 여자가 아이를 낳는 기계냐’, ‘여성이 자궁으로 보이냐는 등의 거센 비판 여론이 일자 30일 해당 홈페이지를 닫고 수정 공지문을 게재했습니다.

 

저출산의 심각성을 알리고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각 지역의 가임기 여성 분포도가 어떤 효율이 있는지 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에 많은 여성들도 가축 취급을 당한 것 같다고 분노를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행정자치부는 여성만을 그렇게 보고 취급하고 있다는 논란을 일축시키기 위한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서비스 취지를 설명하는 관련자 인터뷰부터 보시죠.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22일 발간한 국제성평등지수를 통해 본 성 불평등 실태 및 시사점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성평등 수준은 국제적으로 최하위군에 속해 있습니다.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각종 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 성평등지수는 여전히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지요. 이에 저희 행정자치부에서는 여성들이 겪는 불편을 통감하고 실질적인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로써 여성비하적이라고 비난이 일었던 가임기 여성 분포 지도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행정자치부가 얼마나 양성평등 의식을 가지고 제도를 마련하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 서비스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다. 가임기 여성들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까한 발 더 들어가보도록 하죠. 

 

행정자치부는 현대 여성이 임신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이런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여성들의 근심과 우려를 저희 행정자치부도 통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된 미래와 뛰어난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을 두고 본다면 행정자치부도 어머니와 같은 마음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에 나와 닮은 훌륭한 유전자를 남기는 것의 축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임신과 출산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군요. 그 서비스라는 것이 대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혁신에 가까운 서비스입니다. 관련자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은 더 이상 남성의 경제력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여성 자신과 아이를 끝까지 양육하고 책임져주는 것을 바라고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부터가 잘못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여성 역시 사회에 진출해서 경제력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여성에게 남성의 경제력에 종속되어 임신과 출산을 담보로 결혼이라는 억압적인 제도 안으로 들어가라고 강권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 행정자치부는 이러한 서비스를 마련한 것입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어떤 서비스를 가임기 여성들에게 제공하겠다는 것인지요?

 

아무래도 출산과 육아 장려를 위해서는 복지 이전에 임신이라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에서 착안된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자부가 처음 제공했던 가임기 여성의 지도는 저출산과 가임 여성수를 직결시켜 마치 특정 성별에게 저출산 책임을 미루는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을 적극 수용한 뒤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 같아 보입니다.

 

, 말씀 잘 들었구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공하기로 결정한 그 서비스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관련자 인터뷰를 보시죠.

 

[종마 서비스. 종마. 그런 표현에 불편함을 느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직관적인 이름을 붙인 것 뿐이니까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 것입니다. 여성만을 자궁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임신이라는 것은 생물학 시간에 배우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 행자부는 여성이 원하는 정자란 무엇인가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건강검진을 통해 가족력을 통해 잠재적으로 큰 문제가 없고 신체 건강한 20세에서 33세까지의 남성을 선별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신장은 175~185cm, 15%의 체지방률을 유지하고 임신과 결정적으로 관련은 없다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과 뉴멕시코 대학 연구팀의 조사 결과 여성들은 세계 평균으로 알려진 발기 길이 13.1cm, 둘레 11.7cm보다 다소 길고 두꺼운 성기를 선호하고 이상적으로 여긴다고 하여 발기 시 길이 16.3cm, 둘레 12.7cm가 평균인 남성을 다시금 추려냈습니다. - 오르가슴이 임신의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일석이조의 만족스러움을 여성에게 제공하려는 저희의 야심찬 깊은 뜻이 담겨있는 기준이지요.

얼굴 역시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여성이 선호하는 유형별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고 지능 역시 IQ135 이상을 선발하였습니다.

특성 분야도 다양하게 마련 예체능 계열뿐만 아니라 이공계열 등 아이에게 원하는 재능이 최대한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전 결합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지난 3개월간 흡연이나 음주로 인한 정자 손상이 없으며 강한 전자파나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썼습니다. 정자운동력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도 이뤄졌습니다. 

배란기에 있는 여성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는 해당 남성과 임신을 위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인적 자원을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국가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으로 제시했던 것이 임신할 수 있는 여성에게 국한되어 마치 여성의 책임인양 전가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에 비하면 아주 적극적으로 남성을 이 문제에 참여시킨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임신이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 주체적인 여성이 임신을 원할 때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고심한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항목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서비스에 대해서 남성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종마 서비스에 선발된 남성들과 그렇지 않은 남성의 반응 차가 있나요?

 

대한민국의 남성 대부분이 군필자이지 않습니까? 군대 경험을 통해 국가에 충성하고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철저하게 교육받아 온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국가의 건강한 미래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종마 서비스 제공자로 선발된 남성들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우성 수컷임을 인정받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남성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앞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많은 남성들은 자연 도태의 안타까움과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항해봐야 지금 자신이 가진 수명조차 다하지 못하고 곧바로 안락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불만 표출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은 성폭력 문제가 심각하고 여성들은 삶에서 늘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왔는데요. 이런 서비스를 통해 번식의 기회를 박탈당한 남성들의 분노가 국가가 아닌 여성에게로 향하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습니다.

 

이 종마 서비스와 더불어 종마의 특별함을 유지하기 위해 행자부에서는 탈락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중성화 수술도 순차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반려 동물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성화 수술로 유순해지는 효과도 얻을 수 있기에 그들의 분노 역시 잠재워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행정자치부에서 별도로 마련한 홈페이지에는 각 지역별로 종마로 선별된 남성의 프로필이 제공되어 있습니다. 벌써부터 가임기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상형에 따라 행정지역을 이동하려는 시도도 일어나는 등 참여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가 나서서 이렇게 안전하고 분명한 남성의 정자를 제공해준다면 임신을 해볼까 하는 도전 의식을 품게 되더라구요. 함께 홈페이지를 살펴보던 열여덟 살 동생은 행정자치부의 가임기 기준이 20세에서 44세가 아니라 통계청 기준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을 보아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탁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남성을 보니 육아의 어려움 같은 건 크게 문제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대책을 마련한 걸 보면 앞으로 정부가 출산 이후의 복지에 대해서도 해결방안을 충분히 마련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이군요.

 

오랜만에 정부가 실효성 있는 방안을 제시하여 저출산 문제 해결에 일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어 저 역시 기쁩니다











오늘의 픽션












여성혐오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탓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여성 혐오는 남녀에게 있어 비대칭적으로 작용한다.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이기 때문이다.


'호색'한 남자가 여성을 혐오한다고 하면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이 반응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기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여성을 '여자'라고 하는 하나의 범주에 일괄처리하는 그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여성 혐오 사상의 소유자는 여성에 대해 무관심하게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여성 혐오 사상의 약점이다. '남성성'이라는 성적 주체화를 이루기 위해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그들이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바로 여성 혐오의 내용이다.


'자기 여자'란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남성됨'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역으로 증명한다



남자는 진정으로 성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그렇게나 음담패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해오지 않았고 정형화되지 않은 경험에 관해서는 언어화를 억압해온 것이 아닐까? 아니 반대로 그만큼 남성의 성적 주체화에 대한 억압이 강렬한 것은 아닐까? 라캉이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갈파한 것처럼 남자는 다른 남자의 성적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가 된다. 때문에 남성됨의 방식에는 다양성이 없다. 남자가 발기능력과 사정 횟수에 집착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만이 남자들 사이에서 비교 가능한 일원적 척도이기 때문이다


성별이원제, 가부장제의 핵심은 여성혐오(창녀)와 여성숭배(성녀)라고 보고 있으며 이는 여성 타자화라고 부른다. 차별이란 어떤 이(여성)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남성)와 동일화하는 행위이라고 말한다.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타자이다. 즉, 이방인, 이교도와 같은 맥락으로 여성은 남성들이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다. 우리들로 부터 추방하는 양식이 타자화이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2012년 11월 시애틀


Why Don't Domestic Violence Victims Leave?

- Leslie Morgan Steiner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






















 

몇 년 전 SNS에서 알게 된 몇 명의 친구들로 이뤄진 모임에 나갔을 때 그 중 한 명이 “oo님이 현정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알고 싶어요?”라고 되물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알고 있다는 듯, 그것이 내게 어떤 깊은 내상이라도 입힐 수 있는 사실인양. “, 말해보세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40대 여성 유저에게 내가 쓰는 글이 불편함을 준다는 것. 사적이고 은밀해야할 성적 경험을 풀어놓는 것이 얼마나 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공적 루트가 아니라 정제되고 걸러진 글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관계나 나의 상태에 대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나의 음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수용하기 힘든 주체성이 그녀들을 불편하게 했다. 결혼과 육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아서, 그러면서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진을 올리면서 소위 여성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공격적이지 않게 말하는 법으로 글을 쓰지 않아서가 그 이유였다. 150, 태그까지 포함해서 300자 정도의 글로 설명되지 않는 맥락을 툭 던져놓기 일쑤였고 나도 내가 그런 글쓰기를 하는 것이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해명이나 풀어쓰기 같은 걸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 글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고 남자들에게는 일종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도 있었다. 내게도 실험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쓰고 말하는 것이 여성적 가치를 폄하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성혐오가 두드러졌다면 모를까.

 

그 무렵 나는 내가 하는 일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가 성적 대상이 되는 걸 감수해야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즐기기 위한 포지션도 취해보고 혹은 위악적으로 그걸 이용하기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내게 어떤 만족감이나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모순의 간극만 넓혔다.

 

내가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남자를 못지않게 누리자’,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갖자에 있었지만 내 성을 팔고 있는 건 아닌가, 여성이 성적 경험을 누설하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남성에 대한 회의감만 깊어지고 있었고 사랑 자체에 냉소하게 되었고 동시에 주체적이지 못한 여성적 태도에 대해서도 종종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점에서 내가 과연 올바른가? 내가 여성을 위해 이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여성의 권리를, 양성평등을 바란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어떤 확신 같은 걸 가지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럴 때 페미니스트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기도 하고 각종 진보적 운동을 해오던 친구 D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내왔지만 한 번도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각 같은 걸로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의 균형을 잡게 도와주는 조언, 그리고 내가 공식적으로 작성하는 원고에서 페미니스트로 의식이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자신의 삶 자체에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사회적으로 연대를 이루고 활동을 하는 게 아닌데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여성성을 이용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해도 될까? 하는 고민도 나를 휘감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대학 입학 후 얼마되지 않아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강하게 드러내며 내게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길 바랐던 선배의 훈수가그리고 그 사람이 그 뒤에 보여준 자기 배반적 행보와 인간적 무매력이 나로하여금 페미니스트라는 동류로 묶이는 걸 질색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대학 내내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라며 교묘하게 그리고 비겁하게 말을 돌렸다. 자라오면서 양성평등에 대한 갈증을 느껴왔으면서도 리사 터틀이 말하는 "성차별이 존재하고 여성이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페미니즘의 필요성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로 인식되기 싫어하는 경향. 페미니스트라는 표지에 의해 사납고 경직되고 유머 없고 교조적이며 정치적 올바람에 사로잡힌 여성이자 남성혐오적인 레즈비언 이미지로 비춰질까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나는 나고 자라오면서 해온 모든 행동과 사고들의 근간에는 페미니즘이 있었다. - 그 얘기부터 풀어쓸까 하다 다들 그런 서사를 가지고 있을텐데 싶어서 생략, 언젠가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 사회적으로 여성이 우월하다거나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동등함을 바랐다. 내 삶과 나 자신 그 자체가 페미니즘의 요구였다. 그럼에도 기질적 오만함이나 시행착오 속에서 나의 정체에 대해서 명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내게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안겨준 선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어떤 선언이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그쳐서 깨우쳐질 의식도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기까지 주변의 자극 없이 혼자 눈을 뜨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준 친구 D가 있었고 내가 하는 일로 인해 고민을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계기들 덕분에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D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움직임이 주저하고 있던 누군가에게 그렇다면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동지의식을 갖게 만들 수 있다면 그간 취해왔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를 폐기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섹스칼럼니스트와 페미니즘, 양성 평등을 위한 여권 신장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소위 남성혐오와 색정증이라는 전형적으로 여성혐오의 데칼코마니 형태가 될까봐 조심하는 부분이 있다.

(남성혐오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분노는 일반적인 남성 모두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여성혐오을 내재하고 있는 남성들에 대한 대응적 혐오라고 해야할 것이다. 

한국에서 여성혐오적인 무의식을 가지지 않는 남성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섹스에 대해서 글을 쓰고 말할 때에는

일탈과 쾌락의 요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남들이 해보지 않는 색다른 경험에 대한 과시를 하겠다고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니다.

섹스에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더 좋은 섹스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섹스에 대해 고민한 것을 글로 풀어나간 것이었다.

사랑이 없는 섹스를 할 수 있게 된 지점에 들어섰을 때 조차 

그걸 부정하거나 냉소하진 않았다. (착각되어지는 사랑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웃긴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과 동등해지는 것은 결코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감춘 채 남성의 욕구에 맞는 모습으로 위장하여 

'사랑받기만'을 원한다면, 과연 그 여성이 좋은 섹스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섹스를 통해 남성에게서 뭔가 얻어내려고 하는 여성이 

기꺼이 인내하고 버텨내는 삶에 대해서 판단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 섹스에서 남성은 만족할까? 

(박기만 하는 것 의의를 찾는다면야 그럴지 몰라도

여자친구의 존재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남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의 이중잣대와 이중욕망은 선명하다.)


양쪽이 즐거울 수 없는 섹스를 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페미니즘적인 요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남자들이 만족스러운 섹스를 위한 용도와 목적으로 만나는 여성들에 대해 

판단할 때 깔려있는 여성혐오를 선명하게 읽어낼 때면

더더욱 뒤틀려있는 성 인식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신나고 좋은 섹스를 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감정을 흥건하게 느끼는 일이다.

그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할 수 없다면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라면

정말이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전하고

섹스에서도 능동적이 되는 것이 결코 헤프거나 싸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여성도 남성과 같은 성적인 욕구를 가진 생물체이며

야망을 가지고 있고

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다는 

그 가장 기본적이고도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게 만든  사건과 관련하여 동의했던 글을 옮겨 놓는다.










 




트위터에서 지뇽뇽의 사회심리학 이야기 님이 쓰신 퍼블릭

자신이 겪은 성차별에 대해 적어보라고 하면 남성들은 '데이트 비용을 많이 내는 것' 등을 적는 반면 

여성은 '구직시 불이익, 조직 내에서 배재된 경험' 등 생존 문제와 좀 더 직결된 문제들을 적어 낸다는 연구가 생각남, Jost


이라는 글을 읽으니 <남성성과 젠더>라는 책에서 엄기호 씨가 쓴 챕터가 자동 연상되었다.





데이트비용을 여자가 내면 자존심 상해하는 남자들이 있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에도 경상도 출신 남자들의 경우 이 가오를 중요시 생각하는 부류들이 많긴 하더군)

소위 남성성의 표상이자 자존심과도 같았던 그 데이트비용이 성차별적 요소로 떠오른 건 

남자들이 갑자기 찌질해 졌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언제어디든 찌질함은 정량 보존된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소위 남성성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기에 무릎이 후달거리는 상황이 온 것이다. 

예전에는 데이트비용을 감수하고도 그 연애가 결실을 맺어 결혼으로 이어지면 

이익이 남았는데 남겨먹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오직 소수의 남자들만이 남성성의 가치를 유지한다. 

결국 남성성이라는 건 모든 남성에게 절대 불변의 요소도 아니라는 말이다.


양극화된 남성 중에 사회 경제적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전혀 훼손당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남녀의 성차별적 요소는 데이트비용 이런 차원의 것은 아닐 것이다. 

기꺼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의 남성은 그런 걸 문제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류는 데이트비용 문제로 자신들이 성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못 받을 수도 있다. 

가장 많은 것을 누리는 계층에 있으니까. 

대신 그들이야말론 여성을 여전히 종속적인 존재로 여긴다. 

위협적인 존재라고 느끼기 보단 피곤한 존재라고 느낄지도.



주머니도 헐거워졌는데

여성과의 경쟁에서도 뒤쳐질 수 밖에 없는

양극화된 남성들 중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못하거나 비정규직 임시직의 남성, 

'그 중에서도' 협상력이 떨어지는, '몇몇' 남성은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이는 곧 '섹스'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그런 남성이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하다.

그러니 그렇게 쌓인 분노는 나와 자주지 않는 여성에게로 튄다.

자신의 기회를 빼앗은 건 사회구조와 자신보다 우성인 남성이지만 

가장 손쉽고 약한 여성을 공격한다. 

'너 때문이다. 너가 영악하고, 너가 나빠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소위 연애가 자유로워진 측면과 더불어 여성을 평가하는 이중잣대도 더 심화시킨다.


그래서 여자들이 사랑 앞에서 계산적이고 자신의 가치를 물화해서 남자로 하여금 지출을 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도리어 자신이 우성수컷이 아님을 증명하는 꼴이라는 걸 모른다.

깨놓고 말하면 보상받지 못하니까 쓸 돈이 아까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본인들 역시 정교하게 타산을 따진 셈이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서 남자여자 모두 경제적 동물이다.

자신의 가치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력이든 성적 매력이든 돈으로 환원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왜 갑자기 여자들만 비난받는 거지?



게다가 그것이 성차별적 요소라니.

정말이지 성차별이라는 게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와닿지 않는 거다. 그들은.

그런 걸 겪어본 적이 없겠지.

아무리 찌질한 레벨의 남자라 하더라도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전만큼 남자라서 편히 누릴 수 있는 것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 불만족스러울테지.

그런데 여자가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자 때문에 기회를 잃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균등한 상태에선 그 기회를 가지지도 못할 녀석이었다는 자각과 반성도 필요한 거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모두가 잘나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어떤 역할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를 축적하거나 절세미녀를 품에 안진 못하겠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욕망이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여성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루저 집단이 여성 혐오를 강력하게 키워나가고 재생산해봐야 

사회가 바뀌는 건 없다. 그런다고 가지지 못하는 걸 얻게 되지 않는다.

불쾌감만 양상하고 애꿎은 여자들만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다. 

그런 지점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엄마는 나를 불러 앉혀놓고 동생이 생기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단호했다. "싫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집으로 이사 온 날부터, 그때까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맡아서 키워주셨던 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동안 외동딸처럼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면, 그날 이후로는 엄마의 관심을 서로 끌기 위한 투쟁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엄마의 애정을 반으로 나누는 것도 용납이 안 되는데 1/3 아니, 갓난아이라면 나와 동생은 뒷전이 될 게 뻔했다.

"동생 따위 필요 없어요."
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엄마의 애정을 나눈다는 점이 가장 컸지만, 11살의 어린아이가 생각해봐도 아이가 하나 늘어가는 건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뻔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나의 의견이 수렴된 것인지 어느날 갑자기 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없었다. 다만 <M>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당시, 엄마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뒤늦게 눈치를 채고 말았다.







윤리적,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낙태는 죄악이다. 생물학적으로 태아를 언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이냐를 놓고 입장이 달라지기도 한다지만 그런 것 따위야 편의를 위한 구분이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낙태란 하나의 생명을 없애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남용되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당할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생명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하나?



낙태를 불법으로 만들고, 단순히 금지시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나?
낙태율을 낮추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는 것인가?



낙태문제가 이슈화된 배경을 보자면,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름의 해결 방안으로 제시된 것 같은데.1970년대에는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낙태를 조장했던 정부가, 이제 저출산이 문제가 되니 낙태를 금지시키는 이런 정책을 보면서
이처럼 단순하고 어리석은 조치가 어디있나 싶다.

낙태를 금지시킨다고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사람들이 낙태를 하지 않게 될까?
오히려 음성적인 시술로 산모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84년에 이미 낙태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경우, 낙태의 천국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실상 낙태율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로 첫번째, 철저한 성교육이다. 학교에서 일년에 한 시간 특별활동 시간에 진행되는 남녀의 신체도나 보여주는 단순한 성교육에 그치지 않고, 임신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피임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부모와 사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피임이 얼마나 부당하게 여성의 책임으로만 강요되는 것인지, 얼마나 무지하고 이기적인 남자들이 손쉬운 콘돔을 쓰는 것 조차 싫어하고 거부하는지 생각해본다면 피임을 똑바로 안 했다고 임신한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낙태를 반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책임이라는 측면을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섹스를 쉽게 즐기고, 책임은 지지 않은 남성들의 태도나 성폭력에 대해서 무감각한 혹은 성폭력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한 잘못을 추궁받아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런 것들에 대한 교정은 이뤄지지 않은 채, 원치 않은 임신할 한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아이를 낳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이런 식으로 낙태를 못하게 해서 당장 집계되는 낙태율이 떨어졌다고 만족할 수 있는 문제인가?



두번째는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경제적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한국사회와의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된다. 미혼모나 입양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고 보수적인 한국에서, 아버지가 책임지지 않는 아이를 낳아 키울 여건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만 낳으면 된다. 출산율만 높이면 된다?
그 아이가 국가의 인재가 되리라는 보장은?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결정권을 빼앗으려는 목적이 국가를 영위해 나가는 수단인 인구를 조절하기 위함이라면, 사회적 인간으로 자라나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한 조건 속에서도 머리 수만 채우면 된다는 것인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미국 연쇄살인범들의 많은 수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살인의 판타지를 키워나갔다. 미혼모의 가정환경이 그러하다 단정짓겠다는 건 아니다. 이런 와중에도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돌보는 훌륭한 어머니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힘든 여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방치해둘 수밖에 없고, 원치 않았던 출산이었기에 아이와 소통하거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이 존재한다. 그런 불행한 환경 속에 살아나가는 것이 생명을 가졌기에 누려야 하는 권리인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생각이 없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낙태도 쉽게 생각하는 어린 산모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이 자기 뱃속의 생명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룰루랄라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낙태를 하진 않을 것이다. 결혼제도 외의 출산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시각을 보내는 사회적 인식과 경제적으로 자립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 대한 제도적 원조도 없이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고려되지 않은 채, 낙태금지라는 것은 일종의 폭력아닌가?

낙태를 행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무분별한 낙태에 대한 제지를 가하는 것도 아닌 지금의 이런 상황은 납득이 쉽지 않다.

이런 식이라면 해외원정낙태가 판을 칠 것이고, 국내 낙태율을 떨어지겠지만, 산모 사망율을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프로라이트 의사회의 한 의사가 자기 딸이 강간 임신을 당해도 아이를 낳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과연 그 딸은 동의한 것인지 모르겠다. 혹은 자신의 딸이 그런 일을 당할리 없다는 자만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당해보지 않고 확신하는 말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자신들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맹신이야말고 광신이다.






참고 : 네덜란드인들은 낙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프레시안 - 저출산 탓에 낙태 단속? , 낙태 단속·퍼플잡으로 출산율이 올라가나요?
         이채공간 - 그녀와 잔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껏 엄마는 나를 믿고 꽤나 많은 이야기을 공유해주었고, 일반적인 모녀 사이 치고는 제법 소통을 하는 애증 관계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엄마는 한 번도 낙태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눈치껏 그랬을 거라는 지레짐작을 할 뿐이다. 그런 얘기를 내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 자체에서 엄마가 얼마나 그 일에 대해서 자책하고 죄의식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힘들게 선택한 그 결정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짐작했을 때, 나역시 나의 당돌한 발언으로 아직 작고 어린 생명이었던 동생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출산계획을 세우면서 나의 의견을 물은 것이 아니라, 이미 생겨버린 아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 지 엄마 스스로도 답을 내기 어려운 상태에서 나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아마 그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나의 사악함에 치를 떨면서 저런 언니, 누나였다면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 애정을 반토막으로 나누어가졌던 내 동생의 진술에서 따온 것이므로 막내도 결코 다르게 느끼지 않을 것이리라.

게다가 책임감 강한 장녀로서, 10년 터울의 동생 교육비를 마련하느라 뼈 빠지게 일할 게 분명할텐데, 그렇다면 유유자적을 모토로 하는 내 인생을 뜻하는대로 살 수 없었을 것이며 나는 불행해졌을 것이다. 곧 나의 불행은 주변의 불행으로 번지게 만들었을 것 역시 분명함으로 - 나는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은 강하지만 역시 사악하기도 하니까.

가난한 집에 아이 셋은 너무 많잖아. 한량과 같은 아버지는 동생과 내가 자라는 동안, 소위 아버지의 역할 혹은 적어도 양육에 대한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역할에서 조차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막내가 태어났다면, 몸도 건강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던 엄마가 얼마나 더 많이 일해야 했을까? 일하는 동안 아이를 맡기는 비용 또한 엄청나다. 그걸 엄마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동생 밑으로 들어가는 교육비만으로도 벌이의 절반 이상을 써야했고, 그 당시 엄마는 우리의 대학등록금을 걱정하며 모아두느라 사고 싶은 화장품도, 먹고 싶은 음식도, 이외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온 엄마였다. 

뒤늦게 발견한 엄마의 병이 유전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건강하지 않게 태어날 확률이 높은 그 아이에게도 여러모로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녀의 선택에 돌을 던지려 한다면, 그들을 그녀와 같은 삶 속에 던져주고 싶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아니, 낙태 이전에 그 삶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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