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14 하드코어 로맨스의 시작 엄지와 검지, 단 두 손가락만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남자가 나의 유두를 살짝 잡고 비틀었을 때 지금까지 섹스를 하며 내 몸에 맞게 남자들을 교정하는 데 소모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나름의 의미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지속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워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삭제 버튼을 누를 것이다. ‘좀 더 세게’, ‘아니 그건 너무 아프잖아’ 같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가락은 언제 부드러워야 하는지, 어떤 순간 힘을 줘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를 만지는 강도가 잘 조절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황홀해질 수 있다니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16세기 화가 브론치노가 그린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를 보았을 때 비너스와 큐피드의.. 2026. 6. 19. 서울의 밤 한 남자와 섹스가 끝난 뒤 하나만 사용한 침대에 누워 아직 흩트러지지 않은 다른 침대를 보며 이 밤에 달려와 줄 다음 남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앞선 섹스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다. ‘저기 반짝 반짝이는 이 도시, 뿌연 회색 하늘 밑 눈이 부신 잠들지 못하는 이 도시의 이 밤’ 이효리가 자신이 떠나온 서울에 대한 애증 어린 곡을 발표했을 때 나 역시 서울을 떠나 저 멀리에 살고 있었다. 일 때문에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서울을 방문했지만 머물 집도 처분했기에 호텔에 묵으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섹스를 했다. 나는 항상 트윈 베드 룸을 선택했다. 한때는 연애지상주의자였으며 퀸 사이즈 침대에 한 남자와 눕지 않으면 지독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한 침대에서 남자와 뒹굴 수는 있어도 같이 .. 2026. 6. 19. 어둠이 가져다 준 자유 남자의 시력은 형편없었다. 안경이 없으면 인간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침대로 유인했다. 남자의 셔츠를 벗기며 안경도 벗겨버렸다. 안경을 놓아둔 곳도 찾지 못하는 남자에겐 미안했지만 그의 시각을 빼앗아버리는 것이야 말로 이 섹스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안경을 벗으면 네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불마저 끄는 거야?”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침대 주변을 비추는 아주 약한 빛은 남겨놓았다. 그 빛을 느낄 수 있는 나와 달리 남자는 완벽한 어둠 속에 있었다. 침대에 누운 남자는 팔을 뻗어 더듬거렸다. 남자의 배 위에 앉은 나는 내게 뻗어오는 그 팔을 잡아 바닥에 붙여놓았다. 버둥거리며 나를 만지려고 하는 손을 무릎으로 눌렀다. 움직이지 말라는 나의 신호를 받아들인.. 2026. 6. 19. 사랑은 숙달되는가 사랑을 분석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있지만 머리로만 알게 된 지식은 그 다음 사랑에 완벽하게 반영되지 못한다. 누구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인지 사랑은 배울 수 있고 숙달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경험한 사랑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이번 사랑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는 것은 사랑에 빠진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반복되는 같은 실수 앞에서 자책만 늘어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대를 덜하게 되는 것이었다. 능숙해진 덕분은 아니었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사랑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에리히 프롬은 에서 ‘진정한 겸손과 용기, 그리고 믿음과 절제 없이는 개개의 사랑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덕목들이 드문 문화에서 .. 2026. 6. 19. 안전한 남자들은 섣불리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주 앉아있는 남자와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에 공기의 변화를 느끼면 어김없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당신이 궁금해졌어요.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남자는 그걸 호감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에 두근거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에는 언제나 정확한 불쾌를 느꼈다. 그 말 깊은 곳의 무의식을 내가 간파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둘이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이 무색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말이었다. 이미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밟은 게 아니었던가? 지금껏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무엇이 궁금해졌으며 뭘 더 알고 싶다는 것일까? 얼마나 실례되는 말을 내뱉은 건지도 조차 모르고 해맑게 발정 난.. 2026. 6. 19.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게도 욕정을 느낄 수 있는 남자라서 다행이었다 스물한 살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서른셋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내가 겪은 두 번의 장례식.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두 가지는 내가 상복마저 잘 어울린다는 것과 장례식장에서도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건 남자밖에 없다는 것. 검은색 클러치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을 좀 더 붉게 물들였다. 검은색 상복에 붉은색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장례식장에 마련된 흡연 장소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립스틱이 선명하게 묻어나온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깊은 연기를 내뱉는 나를 보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바는 아니었다. 내게 성적 판타지가 무엇이냐 묻는 남자들이 종종 있다. 나랑 자는 사이도 아니면서 그런 게 왜 궁금한 것일까? .. 2026. 6. 19. 문장이 정갈하고 아름답기보다 삶이 정돈되고 관능적이길 바란다 절정의 순간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 주변만 맴돌며 도달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뭐가 부족한 거지? 남자는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고 나도 내 몸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다. “목을 졸라!” 남자의 손을 내 목으로 가지고 오며 말했다.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아. 글렀군. 착실한 남자들은 아니 정정, ‘섹스를 하다가 인생이 좆 되는 걸 원치 않는’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거 같다. 그런 남자들은 목을 조르지 못한다. 아니 다시 정정, 나의 요청을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목 조르기를 시도한다 한들 후두 옆 양쪽 경동맥을 눌러 뇌로 가는 산소를 일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걸 모른다. 정성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게 목 전체를 눌러 기도를 막아 .. 2026. 6. 19. I 2026. 6. 19. 남자들은 나의 야심을 못 견뎌했다 “거기서 뭐하고 있어?”그의 물음에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아서 C, 클라크의 을 읽던 중이었다. 오버로드의 정체가 묘사되는 결정적 장면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다가 왜 지금 깬 거야. 내가 옆에 없는 줄도 모른 채 5시간 동안 깨지도 않고 쿨쿨 자놓고.’ 그는 내가 무얼 하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섹스가 끝나면 금방 잠이 들어버리는 그와는 달리, 상대방이 먼저 잠들어 버리면 나는 잠들지 못했다. 밤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남자 곁을 지키고 잠결에 뒤척이다 잠깐 안아주는 것으로 그의 애정을 확인하며 안도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손을 꽉 붙잡고 잠든 그의 손아귀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소파에 웅크리고.. 2026. 6. 19. 이전 1 2 3 4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