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뒤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그 사람의 등을 보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든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그 등을 보고 있노라면 쓸쓸해져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항상 먼저 내가 돌아서는 사람, 돌아서서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 때문에 종종 냉정하다는 얘기를 듣곤 했지만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라 뒤돌아볼 수 없을 뿐이었다.

얼마 전 지하철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헤어진 그가 계속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내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던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의 등을 봐주는 일은 강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그의 등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지금 그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을 확인하는 그 순간이다. 그의 목선을 따라 내려와 어깨와 단단한 등에 입 맞추다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을 때는 오히려 감격스럽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본다면 남자들에게 있어서 등이라는 신체부위는 섹스의 사각지대인 듯 하다. 키스를 하며 내 목을 감싸고 있던 그의 팔이 허리 즈음 내려온다. 정확히 내 티셔츠로 파고드는 그 강한 팔은 거추장스러운 셔츠와 브래지어를 순식간에 제거하고 가슴을 공략한다.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다음 순서. 내가 몸을 비틀어 등을 보여도 나를 부침개 뒤집듯이 똑바로 눕힌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를 향한 집요한 여정을 계속할 뿐이다. 정말이지 ‘등’은 가방 멜 때만 쓰는 신체부위가 아니다.

등을 완전히 노출하게 되는 후배위일 때에도 등은 버림받은 존재다. 좀 더 강하게 삽입하기 위해 허리를 붙잡거나 어깨를 잡을 때에도 등은 완벽하게 무시된다. 시야에서 벗어난 가슴은 움켜잡으면서 눈앞의 등을 어루만져 주거나 키스하는 세심한 남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그 순간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게 허리와 허벅지에 반동을 주며 움직일 때는 다른 건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내 등은 그 순간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볼 때만큼이나 쓸쓸함을 느낀다.

손바닥, 손목 그리고 팔에 정성스러운 입맞춤을 하고 난 뒤 어깨와 목, 그리고 등으로도 따뜻한 그의 입술이 이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그런 다정다감한 키스는 공들여야 하는 척 섹스, 운 좋으면 뒤이어 한두 번. 그 이후에는 종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섹스에 있어서 등은 쉽게 잊히는 부위가 된다.

그러나 등을 애무하고, 적당한 힘을 줘서 척추뼈를 쓸어주는 방식의 어루만짐은 짜릿함 뿐만 아니라 충분한 만족감까지 준다. 내가 보지 못하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그 곳까지 누군가 어루만져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섹스를 할 때 등을 빠뜨리지 않는 습관. 사랑받을 수 있는 비법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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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생물학적인 이유로 바람을 핀다고 쳐요.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바람을 피는 거죠?” 그렇게 물어본다면 이는 여성의 생물학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남성이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고 싶어 한다면 여성은 더 우월한 유전자와 결합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현재 짝이 있더라도 더 강하고 매력적인 남성과 짝짓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는 남녀의 특성을 아주 단순하고 단편적으로 본 것이다.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생물학적 본능 이외에도 복합적인 이유로 정절을 지키기를 선택하거나 바람피우는 것을 선택한다.

바람을 피우는 일, 특히 여성에게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존재하곤 한다. 여자에게는 몇 년간 사귄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와 헤어질 마음도 없고 생에 마지막 사랑이길 원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가 보여주는 사랑의 태도가 예전만큼 열정적이지 않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집착이나 애정의 정도가 커진다. 그런 태도가 관계를 망칠 수 있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여자는 자신이 여전히 섹시한 존재이며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인지 타인을 통해 증명 받고 싶어진다. 애정결핍의 반작용이다. 그럴 때 여자의 주변에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능수능란하고 여자를 잘 다룰 줄 아는 남자가 있다면 그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용하게 된다. 하룻밤 혹은 몇 번의 섹스 정도면 여자도 그 상대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여자는 매력적인 남자가 자신을 여전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사랑스럽지 않아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몹쓸 부정적인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묘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내게 만족을 주는 사람은 새로운 관계의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여자는 여유를 되찾는다. 사랑의 표현방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것이지 열정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해줄 수 있는 여유이다. 그가 변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힘들었던 여자는 타인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관계에 있어서 조급했던 마음을 한 발 뒤로 물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궁극적인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반복적으로 그 여자를 덮칠 수 있고 그때마다 타인과의 섹스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장기적으로 그 여자에게 좋은 일은 아닌 것이다. 이런 방식의 바람은 자아존중감이 낮은 여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이며 이런 식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바람을 피는 이유다.





생물학적인 본성이 그러하지만 우리는 사회라는 제도를 통해서 일부일처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관계를 맺을 때 지켜야 할 의리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가피한 바람은 언제나 두 사람에게 불고 있다. 제도가 본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그 제도가 어쩜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바람을 피운다는 건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바람을 피우지 말라. 바람은 나쁜 것이다’고 단정 짓지는 못한다. 사람은 제각각 각자의 사정들이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을 들키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다. 재주껏 피우지 못할 바람이라면 자제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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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것들은 언제나 우리의 눈길을 잡는다. 점잖은 척, 아닌 척해도 곁눈질도 힐끔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야한 것들은 우리를 흥분시키고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며 온몸에 생동감을 넘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내놓고 야해지기란 쉽지 않다.

성인영화를 보는 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스피커 대신 이어폰을 꽂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가 듣지도 보지도 않는데, 죄의식을 가슴 한편으로 느낀다. 게다가 소위 야동, 포르노 영화들은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그 행위는 행위를 나누는 두 사람의 쾌락보다는 남성의 욕구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보니 랜덤으로 다운받은 동영상이 여성에게는 불쾌감과 거부감을 주고 성인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그런 영화를 보며 자란 남성들은 그런 행위들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하며, 부당한 요구를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당당하게 하곤 한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야한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여성이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 동시에 즐겁게 볼 수 있는 야동을 찾아보려는 마음으로 한동안 수없이 많은 야동을 3배속으로 보며 검색을 했다. 포기하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하던 때에 ‘반짝’하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핑크영화제! 그렇다. 우리에게는 ‘핑크영화제’가 있다.

2010년 올해로 4회째를 맞는 핑크영화제가 11월5일 개최된다. 핑크영화는 일본 독립영화의 한 장르로 제작비 300만엔, 촬영기간 3~5일의 초저예산 소규모 영화로, 60분 정도의 러닝타임 속에 베드신 4~5회가 들어가야 하는 룰을 지키며 만든 영화이다.

핑크영화제는 수없이 양산되는 핑크영화 중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성적 쾌락을 탐색해 나가고 성적 주체성을 가진 여성으로 진화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유쾌하고 공감이 되는 성인 영화들로 채운 영화제이다.

핑크영화 속에는 남성의 기형적 욕망에 맞춰 여성의 입에 사정을 하고 정액을 먹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 같은 장면들이 비일비재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가슴 사이즈가 G컵, H컵이면서 허리는 가늘고 팔이 낭창낭창한 비현실적인 몸매를 가진 배우도 없다. 약간은 통통해서 튀어나온 배가 귀여워 보이는 현실적인 여성들이 배우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핑크영화제는 삶에 부족한 야함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타인의 섹스를 훔쳐보기 식으로 관람하게 되는 야동과는 달리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다’하며 감정이입을 하며 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주어지고, 달뜬 마음이 되기에 결코 빈약하지 않는 정사신이 어우러져 있기에 때문이다.

골방에서 불을 꺼놓고 은밀하고 몰래 즐기는 대신 극장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당당하게 즐기는 성인영화. 상상만 해도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곁눈질로 관찰해보기도 하고 내심 오늘 밤엔 이 영화처럼 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돌아갈지도 모른다.

올해 핑크영화제는 작년보다 더 많은 날짜를 할애해 남성 관객의 입장을 허용하였기에 남자친구, 남편과 함께 핑크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 작년에도 혼자 보러왔던 중년여성들이 남편과 다시 한 번 영화제를 찾고, 젊은 커플들의 호응도 좋았다.

비록 규모는 아담하지만 비타민처럼 결핍 되서는 안 될 ‘야함’을 우리 삶에 채워주는 핑크영화제를 통해 여성의 내밀한 욕망, 여성이 원하는 섹스에 대해 높은 이해력을 갖춘 남성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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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에는 불효를 계획했다. ‘조상님, 죄송합니다. 성묘를 하러 갔을 때도, 차례를 지낼 때도 제 모습은 보시기 힘드실 거예요.’ 불호령이 떨어질까봐 아버지에게는 아직 알리지도 않았다. 일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줄 아시는 어머니께는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불효를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역시 어머니는 ‘추석 때 출장을 보내는 회사가 어디 있니?’ 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으셨다. “응, 바쁘면 좋은 거지. 일하는 게 남는 거다.” 나를 믿어주시는 어머니께 미안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바로 어머니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추석 연휴기간, 나는 한국을 뜬다.

몇 달 전부터, 아니 사실은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나의 데이트’ 소식이 업데이트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며 남자는 만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 하셨다. 하지만 사귀는 남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봐야 어머니 눈에 차는 남자들은 없었다. 지금이야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비치는 아버지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훤칠하고 잘생겼으며 소위 ‘간지’까지 겸비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어머니이기에, ‘내가 연애를 한다면 장동건이나 차승원은 돼야 하지’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셨다. 당연히 사윗감의 성품이나 경제력 이외에도 외모 역시 평가에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신다.

처음 연애할 때야 어머니께 조잘조잘 보고도 잘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어머니의 의견을 참고하기도 했지만, 이 남자랑 결혼할 거 아니고 연애 좀 하는 건데도 연애의 끝은 이별이 아니라 결혼이라고 생각하시는, 어떤 면에서는 보수적인 어머니이기에 데이트남의 정보를 공유해봐야 엄격한 기준에서 마음에 안 드는 몇 가지는 항상 지적받았다.

그렇다보니 어머니가 나서서 선을 볼 남자를 주선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에 나는 결혼을 하기엔 아직 어렸었고 좋은 남자에 대한 안목도 부족했던 때였다. 어머니가 소개해준 사윗감으로 걸맞은 조건을 가진 남자들은 준수한 외모는 가졌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너무나 강해 보였다. 군소리 없이 선 자리에 나가 참하게 앉아 있다 돌아오긴 했지만 스물다섯도 안 된 나에게 그들은 답답하고 심심한 남자로 분류될 뿐이었다.

그렇게 훅하고 세월이 흘렀다. 주변에 괜찮은 목록은 바닥났지, 딸의 나이 앞자리엔 숫자 3이 자리를 잡았지, 남자는 있는지 없는지도 알려주지 않지…. 조바심이 나신 어머니는 몇 달 전 결혼정보회사에 딸의 정보를 넘겨줄 마음을 잡수셨다.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들이 등급을 받고 팔려나가듯, 몇 백의 돈을 내고 처참한 자기 등급을 확인해야 하는 그런 일이 달가울 리 없었다. “어머니, 가입비를 차라리 절 주세요. 그 돈에 좀 보태서 난 유럽 여행을 가겠어요.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영국을 찍는 겁니다. 그래서 각 나라의 남자들이랑 자보는 겁니다. 비록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넘치는 글이 되겠지만 각국 남자들의 작업 방법이라든지, 밤의 테크닉을 비교하는 글을 쓰는 게 오히려 더 유용하고, 즐거울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매일하던 안부전화도 딱 끊고, 행여나 어머니의 전화가 오면 “회의 중이에요. 있다가 걸게요”라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그러나 온 친척이 모이는 추석은?




그래서 마감을 끝내놓고, 비겁하지만 도망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결혼할 생각도 없고요. 관심 좀 꺼주시겠어요?’라고 용감하게 맞서 싸워 봐야 그것이 진정 불효였다.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것. 그리하여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 친가, 외가를 다 포함해도 첫 째인 나의 결혼 여부와 만나는 남자의 존재 유무가 화제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선택인 동시에 스스로의 행복을 찾는 일이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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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자친구가 뛰는 경기도 아닌데, 대체 왜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너와 함께 축구를 봐야 하는 건데?” 우리는 JJ를 만나기 위해 퇴근 지옥길인 사당역을 빠져나와 5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줄을 선 끝에 수원행 버스를 탔다. 경기 관람도 하기 전에 이미 녹초가 된 우리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JJ는 캡틴 박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지난번에 만날 땐 이대호 이름이 적힌 롯데 핑크색 저지를 입고 있지 않았니?” JJ는 호호호 거리며 별걸 다 기억한다며 쑥스러운 척을 했다. “그게 언제 적 얘기니, 나 이제 축구야. 축구가 최고라니까.” 월드컵이 끝난 후 주가가 확 올라가버린 귀염이 기성용이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의 동의도 없이 A매치 티켓을 끊고는 통보한 JJ에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멀리 스코틀랜드에서 날아온 KI를 한 번 보겠다는 마음으로 수원까지 왔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근황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남자의 진정한 매력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알지 못하는 주변 친구들이 ‘운동하는 남자는 뇌도 근육으로 되어 있을 것 같아 별로다’라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을 때부터 종목을 가리지 않고 체대 다니는 애들만 섭렵했던 JJ. 현재 축구라는 종목에 안착할 때까지 배구, 탁구, 농구, 야구라는 공통점이라고는 구기종목인 것 밖에 없지만 일관성 있게 운동선수들을 만나왔다.

“내조가 별 게 아냐.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거, 나도 같이 좋아하는 게 내조지.” 남자친구가 훈련을 하느라 데이트를 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에도 쓸쓸해하거나 외로워할 틈도 없었다. 몸에 좋은 보양식을 손수 만들기 위해 요리학원에 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시간을 일부러 내서 프로팀의 경기를 보러 다니며 해당 종목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쌓아 나가는 것도 JJ의 주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바쁘다보니 친구들을 만날 때도 항상 경기장으로 불러내는 그녀였다.

전반전에 윤빛가람과 최효진이 골을 터뜨린 이후 박지성과 기성용도 교체되어 살짝 지루한 감이 들기 시작한 후반 말미, 운동장을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축구선수들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JJ가 말했다. “90분을 저렇게 달리는 체력은 말이야. 어떤 종목도 따라갈 수 없단 말이지.” 우리는 뭔소리냐는 식으로 JJ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함축된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려면 뭐가 중요하니?” JJ가 다그치며 물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대답한다. “발기의 지속력? 혹은 페니스의 단단함의 정도.” “그렇다면 발기의 메카니즘이 뭐니? 바로 혈액순환 아니겠어? 혈액순환과 직결된 게 무엇인니? 바로 폐활량 아냐!”

어떤 운동 종목보다 오래, 그리고 격하게 계속해서 뛰어다니는 축구가 최고라는 거다. 농구도 그렇지 않냐는 물음에 “아냐, 아냐. 걔들은 순발력은 있는데 지구력이 없어. 은근하게 오래 버티는 맛은 축구가 최고란 말이지.”

그렇게 축구선수를 예찬하는 JJ. 아무래도 그녀가 수영선수를 만나지 않는 이상, 구기 종목에서는 축구 선수 이외 다른 종목의 선수를 만날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세렝게티의 허약한 기린 같아 보이는 크라우치가 섹시 톱10 모델에 드는 자신의 약혼녀 애비 클랜시를 두고 매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용서를 받은 데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요인 외에도 다른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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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서 하는 섹스, 특히 여자 둘에 남자 하나의 구성은 꽤 많은 남자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류가 자신의 쓰리섬 경험을 털어놓기 전까지 내게는 현실감이 부족한 일이었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그런 섹스는 절대 안하지. 내 남자의 애정을 다른 여자랑 나누고 싶지 않다구.
게다가 고작 두 번 하고 나면 지쳐 나가 떨어지면서 어떻게 두 여자를 완벽하게 만족시키겠다는 거야?
두 여자가 한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거?
그건 포르노적 환상을 뛰어넘은 개굴개굴 개구라야.”


류는 '쓰리섬'에 대한 자기 취향은 확실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하룻밤에 두 번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자신의 옆에서 먼저 곯아떨어져 버리는 애인을 보며
언제나 말똥말똥한 눈을 한 채로 아쉬워하던 류였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쓰리섬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완벽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류의 사랑이 덧없이 끝나버리고 난 뒤,
류는 짧고 한정된 삶을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다정다감하면서도 예쁜 얼굴을 가진 A가 류를 유혹했다.
A는 류가 호기심이 넘치고 충동적인 면이 있는 여자임을 간파했다.
몇 번의 섹스를 나누고 A는 자신의 친구 B를 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A가 먼저 자리를 뜨고 B와 류만 단둘이 남았을 때, B는 류에게 키스를 했다.
B는 시니컬하기 짝이 없고 사랑 따위 믿지 않는 그런 남자였지만 굉장히 훌륭한 키스를 했다.
류는 그대로 B와 섹스를 했다.


“둘 다 여자를 다룰 줄 알더라구. 나쁘지 않았어. 그걸 알고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낯선 사람과 쓰리섬? 그건 결코 안 되지.
한 사람과 할 때도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날 때가 있는데, 둘 다 그 모양이면 완전 엉망진창일 게 뻔하잖아.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순 없어.”



A와 B 그렇게 두 남자와 각각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어느 날,
류의 집에 그 둘이 와인을 몇 병 사들고 사이좋게 찾아왔을 때 류는 직감했다.
오늘은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겠구나.
그들이 단순히 술 몇 잔 나누어 마시며 속 깊은 얘기나 해보자고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A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섹스를 하는 반면 B는 거칠고 격정적인 방식으로 류를 다루기에
그 둘의 강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자신을 상대할지 내심 기대를 했다.


“둘이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는 걸로 봐서, 내가 처음은 아닌 것 같더라.
그 둘. 뭐랄까 안 해본 것 없이 여자를 너무 많이 안은 탓에 이렇게 자극적인 것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여운 남자들이었지만 그런 허망한 섹스를 하면서도 기술은 좋아서 말야. 뭐랄까 나처럼 ‘애정 없는 섹스가 더 편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상대더라구.”



류는 포르노에서나 보던 체위를 자신이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더 흥분했다.
한 남자와 섹스를 할 때 보다 몸의 구석구석까지 자극을 받았고, 류 역시 두 명의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몸을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손을 쉬지 않고 놀리다보니 섹스가 끝나고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섹스를 하다 지쳐 잠든 적이 없는 류였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쓰리섬'을 변태 플레이라고 뭐라고 하든 말든 지상 최고의 섹스였다고 자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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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 사이에 우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 연애할 때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것이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기에 자연히 소원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혹은 본인이 연애를 하지 않을 때만 당장의 외로운 마음 달래보겠다는 심산으로 친한 척 연락을 하는 얄팍한 우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이웃사촌과는 한결같이 적당한 거리에서 친절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화장을 막 지운 민낯에, 앞머리를 올리고, 추리닝을 입은 상태로 맥주를 마시며 깔깔거리고 바보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울컥해서 우는 일도 가능했다. 동성 친구끼리도 그런 모습으로 과도하게 솔직한 이야기를 하며, 이를테면 본인이 생각하는 ‘생애 가장 부끄러웠던 섹스’라는 주제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밥 먹을 사람이 없을 때 서로 불러내서 밥을 먹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맥주 한 잔을 청하기도 했다. 약국은 이미 닫은 늦은 밤, 파스나 밴드나 두통약 같은 것들을 제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항상 이별하고 나면 며칠씩 앓아눕곤 하는 나를 위해, 혹은 병원에 입원한 그를 위해 병문안을 가는 것도 귀찮아 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주변에서는 쓸데없는 남자를 만나느라 시간 낭비 말고 옆에 있는 이웃사촌과 연애를 하라는 말도 듣곤 했다. 이성과 친구로 지낸다는 게 가능하느냐는 식이었다. 덩달아 내 동생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남자친구들보단 나의 이웃사촌이 뭔가 더 매형 같고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소년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른스러웠고,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쉽게 우울모드를 가동하는 내게 엄격한 듯 하면서도 내 투정을 다 받아주고, 날 놀리는 듯 하면서도 적당한 위로를 해주는 꽤 괜찮은 남자였다. 대화도 잘 되고, 정치적 성향도 비슷하고, 음악 취향도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독특한 내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흔하게 만날 수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의 매력을 과신했던 당시엔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챙기고 좋아하는 사이면서 관계를 우정에 한정해놓고 진전이 없는 그를 보며, ‘게이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적인 대화 방식에도 거부감 없이 잘 참여하고, 이해의 스펙트럼이 일반적인 남자들에 비해 확실히 넓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내가 그가 좋아하는 작고 귀여운 외형을 가진 여자가 아니고, 나 역시 그와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는 장면을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우정’의 상태로 지속 가능할 수 있었다. 새벽에 함께 술을 마시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알딸딸해져 술기운을 핑계로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는, 단지 옆에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덜어 주리라는 허튼 기대를 하지 않는 이 명료하고 명백한 우정은 남녀 간의 애정보다 더 강하고 튼튼했다.

하지만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듯이 이웃사촌은 유학을 가기로 결정을 했다. 지난주에 이사를 하고 본가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하는 그를 위해 송별회를 준비했다. 그렇게 즐겁고도 유쾌한 술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그는 이제 나의 이웃사촌이 아니다. 칼럼 원고를 다 쓰고 남성적 시각으로 조언이 필요할 때 서슴없이 봐달라고 할 수 있는 친구, 연애를 하면서 좀 지질하다 싶은 하소연을 할 친구가 더 이상 곁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와 시간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그와 나누었던 3년간의 우정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한 적은 없지만, 어떤 좋은 섹스보다도 내게 큰 위안과 따뜻함을 주었던 그가 부디 자신의 꿈을 성취해 나가길, 나는 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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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빼먹지 않고 한 일은 등교하는 길에 만화방에 들려 순정만화 3~4권을 빌리는 것이었다. 소위 멀티가 가능했던 나는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수업 중 필요한 대답을 추임새로 넣을 줄 아는 적극적인 학생이 교과서 뒤로 만화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선생님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가끔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음소거가 되고 만화책 속에 빠져들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터프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손목을 낚아채서 어디론가 끌고 나가다 마침 보이는 벽에 밀쳐놓고는 입술이 찢어지듯이 혹은 부르트듯이 둘 중 하나는 하게 될 듯한 거친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ゲ-ムの名は誘拐), 히라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g@me의 한 장면



‘아, 이런 키스를 하고 싶어!’ 소녀의 마음 속 가득 울려 퍼지는 욕망의 음성만 귓가에 들릴 뿐이었다. 여기서 주의! 그렇다고 아무나 그래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이 키스의 전제조건은 나도 마음이 가는 상대인데,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원하고 있음을 표현해주는 방식으로서의 격함이지,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서 억지 키스를 받고 싶은 마음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알고 있다. 연애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을 키워주는 순정만화의 폐해. 그러나 종이에서나 보던 그런 키스는 TV브라운관 속 드라마에서도 적극적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렇다보니 스무살, 학교 기숙사에 모여 친구들과 키스에 대한 환상을 공유할 때에도 대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바로 그런 키스였다.

환상이 가득하고 혈기왕성했던 그 시절에 격한 키스 사고는 내게 생기지 않았다. 내가 만난 현실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소심남이거나 매너남이었다. 서로 좋아하고 있는 게 뻔한데도 계속해서 키스할 타이밍을 놓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내 쪽이 엄청 안달을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 번도 키스를 해보지 않은 미숙한 상태에서 먼저 덤벼들긴 싫었다.

결국 어찌어찌하여 그와 키스를 하긴 했지만 몽롱하게 다리에 힘이 풀리며 뭔가 취한 듯 하면서도 짜릿한 키스가 아니라 다소 나의 환상과는 괴리가 있는, 수줍고도 밋밋한 무색무취의 물맛 키스였다. 결국 그 일로 말미암아 순정만화에서처럼 수동적으로 키스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먼저 키스하는 일은 쉬운 여자라서가 아니다. 키스로 상대를 조금 더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기기 때문이다. 단지 잘하고 못하고의 테크닉을 판단하는 건 아니다. 우선 내가 먼저 키스를 하고 싶을 정도로 섹시한 남자인가 하는 것. 경솔하게 키스를 남발하는 타입은 아니므로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다면 그만큼 내 눈과 마음에 꽉 차는 남자란 의미이다.

게다가 내가 먼저 한 키스에 대해서 ‘가벼운 여자’라는 식으로 곡해한다거나, ‘꼬신 건 그쪽이니, 굳이 내가 책임질 필요 없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남자인지 아닌지 재빠르게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내가 먼저 키스를 했던 남자 중에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키스 후 관계 정립이 손쉽게 되었다. 내 남자 획득! 그래서 남자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용지로 키스를 자신있게 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지 않고, 키스를 했는데 ‘정말 어디서 배워서 이 모양이야?’ 라는 생각이 드는 남자랑도 연애는 할 수 없다. 키스할 때조차 이기적인 혀놀림을 하며 나와의 리듬을 맞추지 않는 남자라면 옷을 벗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게다가 자신만만해하며 먼저 키스를 시도하는 남자들이야 말로 위험할 수도 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여성의 순정만화적 환상을 간파하고 그것을 연출할 줄 아는 잘 트레이닝된 바람둥이일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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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방영된 '검사 프린세스', 종영 2회만을 남겨두고 서인우의 진심을 알게 된 마혜리는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 행동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지금 해줘’라고 애절하게 원하는 마혜리의 뺨을 쓰다듬어주던 서인우는 마혜리에게 키스를 한다. 키스를 하며 마혜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서인우의 팔이나, 서인우의 옷자락을 지긋이 잡던 마혜리의 손이나, 포개진 입술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혀의 움직임은 확실히 느껴지는 둘의 애틋한 키스를 연출한 방식 때문에 그 순간 저런 좋은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부러우면 지는 것 같아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키스를 한 적이 있었다.





H와 무슨 일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제대로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상황이 불편하고 싫었다. 그래서 H에게 다가갔다. 아직 화가 안 풀렸다는 듯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H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턱에 힘을 주고 완강히 거부하는 듯 했다. 나는 ‘나한테 화내지마, 미안해’ 그런 마음을 담아 아주 천천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을 혀로 핥는 순간 그는 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키스는 서로를 먹어치울 것처럼 격렬해졌다. 15세 시청가의 트렌디 드라마와는 다른 진행. 담백하게 키스로 끝낼 제어장치는 없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졌다.

섹스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둘 사이에 있던 부정적인 긴장감은 확실히 사라졌다. 이래서 어른들이 부부는 싸워도 각 방을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거구나 싶었다. 그렇게 서로의 몸이 맞닿자, 가슴에 뭉쳐져 있던 감정 같은 것도 풀려버린 듯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어색함, 나한테 화를 내고 있는 H를 보는 게 싫다는 이유로 우리가 싸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결방안도 얘기하지 않고 그의 화를 풀어볼 요량으로 섹스를 한 건 완벽한 내 실수였다. H는 섹스 후 그 문제도 함께 종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섹스를 화해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건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고 말았다.

H에게는 내가 먼저 달려들었지만 남자들 중에서도 여자가 화를 내면 다짜고짜 달려들어 섹스를 하면 풀린다고 생각하는 몇몇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상한 기분을 달랠 수는 있을 것이다. 앙탈을 부리면서도 자신의 몸을 사랑해주는 연인의 손길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눈치껏 잘 해야 한다. 아직 화도 제대로 안 풀려서 정말 싫고 미워죽겠다의 감정 상태인데 섣불리 들이대다간 관계만 더 악화시킬 뿐이다.

연인 사이든, 부부 사이든 싸우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서로의 속마음과 문제 상황을 알아차리고 오해나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난 뒤의 섹스는 오히려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만들고 행복감을 더해줄 것이다.

그러나 싸움 후에 섹스로 둘 사이의 문제를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고자 하는 건 결코 훌륭한 방법은 아니다. 섹스로 서로 거칠어진 마음에 보습을 했다면 싸운 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안하다는 의미가 담긴 키스, 화해의 섹스는 아무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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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친구와 카페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녀석이 물었다. “안 한 지 얼마나 됐어?” 응?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입모양으로 ‘섹스’라고 했다. 으흠, 안 한 지 얼마나 됐지? 바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다리털을 밀지 않은지도 꽤 되었잖아.

이건 싱글 생활을 즐기는 게 아니라, 몸에 사리가 나올 정도로 금욕 생활을 하는 셈이었다. 그 질문이 뭔가 자극이 되었다. 연애를 안 하고 있다고 섹스리스하게 지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일주일이면 일곱 번은 해야 해!’ 라고 하던 섹스에 대한 열정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무성인간처럼 지내고 있었다. 섹스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누구와?’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클럽에 가서 노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럴 때 섹스할 수 있는 담백한 남자인 친구도 없었다. 역시 문제는 상대를 찾는 것이었다.

고민만 하다 기분을 전환하려고 미용실을 찾았다. 내 머리를 맡아주는 원장은 키는 좀 작지만 아이돌처럼 예쁘장하게 잘 생겼다. 1년 정도 꾸준히 이 미용실을 다녔고, 피트니스까지 같은 곳에 다니기에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는데 그날 따라 원장은 내 근황을 궁금해 했다.

요즘은 내 방 창문 앞에 밥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를 돌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도 창문 앞에 가서 ‘냐옹~’ 하고 울면 밥을 주냐고 물어봤다. ‘귀엽구나. 영업을 좀 잘 하시네’라고 생각하곤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날 밤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 받자마자 ‘냐옹~’하고 우는 목소리. 고객카드에 써놓은 번호를 보고 전화를 한 미용실 원장. 집 근처에 있다며 자기도 고양이가 보고 싶어서 연락을 했다고 했다. 하하, 고객카드에 집 주소도 적었었지. 이 늦은 밤에 예상치 못한 남자에게서 이런 전화를 받고 보니 섹스에 대한 나의 강한 열망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인가 싶어 마음의 문도, 내 방의 문도 열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소위 작업남들이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쓸 만한 모성애를 자극하는 사연을 이야기하고, 보기와 다르게 여자에 별 관심도 없고, 섹스에도 별 흥미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바람둥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엿보였다.

하룻밤 섹스만을 위한 거라면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관심과 호감을 그쪽에서 먼저 표시했으니 못 이긴 척하며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는 팔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근사한 문신도 가지고 있었다. 문신있는 남자와 해보고 싶었던 나의 욕망도 채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와 입을 맞추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키스테크닉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이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미용실 원장을 문 밖으로 내쫓고 말았다.

저절로 굴러들어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린 이 사건으로 친구 녀석에게 한동안 구박을 받긴 했지만 그때 내 머리 속에서는 ‘배고플 때 쇼핑하는 게 아니다’ 혹은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의 경고가 머릿속에 가득 울리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틀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3일째 되는 날부터는 잘 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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