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사이에 우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 연애할 때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것이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기에 자연히 소원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혹은 본인이 연애를 하지 않을 때만 당장의 외로운 마음 달래보겠다는 심산으로 친한 척 연락을 하는 얄팍한 우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이웃사촌과는 한결같이 적당한 거리에서 친절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화장을 막 지운 민낯에, 앞머리를 올리고, 추리닝을 입은 상태로 맥주를 마시며 깔깔거리고 바보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울컥해서 우는 일도 가능했다. 동성 친구끼리도 그런 모습으로 과도하게 솔직한 이야기를 하며, 이를테면 본인이 생각하는 ‘생애 가장 부끄러웠던 섹스’라는 주제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밥 먹을 사람이 없을 때 서로 불러내서 밥을 먹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맥주 한 잔을 청하기도 했다. 약국은 이미 닫은 늦은 밤, 파스나 밴드나 두통약 같은 것들을 제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항상 이별하고 나면 며칠씩 앓아눕곤 하는 나를 위해, 혹은 병원에 입원한 그를 위해 병문안을 가는 것도 귀찮아 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주변에서는 쓸데없는 남자를 만나느라 시간 낭비 말고 옆에 있는 이웃사촌과 연애를 하라는 말도 듣곤 했다. 이성과 친구로 지낸다는 게 가능하느냐는 식이었다. 덩달아 내 동생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남자친구들보단 나의 이웃사촌이 뭔가 더 매형 같고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소년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른스러웠고,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쉽게 우울모드를 가동하는 내게 엄격한 듯 하면서도 내 투정을 다 받아주고, 날 놀리는 듯 하면서도 적당한 위로를 해주는 꽤 괜찮은 남자였다. 대화도 잘 되고, 정치적 성향도 비슷하고, 음악 취향도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독특한 내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흔하게 만날 수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의 매력을 과신했던 당시엔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챙기고 좋아하는 사이면서 관계를 우정에 한정해놓고 진전이 없는 그를 보며, ‘게이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적인 대화 방식에도 거부감 없이 잘 참여하고, 이해의 스펙트럼이 일반적인 남자들에 비해 확실히 넓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내가 그가 좋아하는 작고 귀여운 외형을 가진 여자가 아니고, 나 역시 그와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는 장면을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우정’의 상태로 지속 가능할 수 있었다. 새벽에 함께 술을 마시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알딸딸해져 술기운을 핑계로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는, 단지 옆에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덜어 주리라는 허튼 기대를 하지 않는 이 명료하고 명백한 우정은 남녀 간의 애정보다 더 강하고 튼튼했다.

하지만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듯이 이웃사촌은 유학을 가기로 결정을 했다. 지난주에 이사를 하고 본가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하는 그를 위해 송별회를 준비했다. 그렇게 즐겁고도 유쾌한 술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그는 이제 나의 이웃사촌이 아니다. 칼럼 원고를 다 쓰고 남성적 시각으로 조언이 필요할 때 서슴없이 봐달라고 할 수 있는 친구, 연애를 하면서 좀 지질하다 싶은 하소연을 할 친구가 더 이상 곁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와 시간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그와 나누었던 3년간의 우정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한 적은 없지만, 어떤 좋은 섹스보다도 내게 큰 위안과 따뜻함을 주었던 그가 부디 자신의 꿈을 성취해 나가길, 나는 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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