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말했다. "나는 '결혼도 하기 전에 해 버리면 엄마 얼굴은 어떻게 보지?' 그런 생각을 했어. 그래서 결정적 순간이 오면 당혹스럽고 피하고만 싶었지. 하지만 자꾸 하자고, 하자고 보채는 걸 보니 내가 그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하더라. 그래도 도저히 못하겠더라.

1년 넘게 사귀었는데, 계속 안 하겠다고 버티면 헤어질 것 같은 거야. 그제야 큰 맘 먹고 하자고 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완전 긴장했지. 걔도 서툴고 나도 처음이니 잘 될 리 없었어. 서로 낑낑거리다 너무 아파서 하다가 그만 두고 화장실에 가서 앉았지. 그런데 피가 나더라. '제길, 해버렸네. 난 망했다. 얘한테 시집 가야 되는 거구나.', '엄마가 알면 날 죽이겠지?' 그런 생각 들었어."

박이 공감한다. "나도 최대한 섹스를 유예시키고 있었어. 쉽게 해버리고 싶지 않았어. 진짜 내 상대를 만나면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할 수 없더라. 그래서 20대 초반에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 찬 어린 애들이랑 연애할 때는 몸에 손도 못 대게 했지. 버티다 보니 24살. 그땐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몸을 열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어. 지금도 쉽게 해버리지 않은 건 잘 했다 싶어."

우리들 중 가장 빨리 해치웠던 최는 말했다. "나는 말야. 그게 정말 나쁜 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인지 난 오히려 빨리 해 버리고 싶었어. 늘 어른들의 기대에 맞춰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짓눌림이 싫었던 탓인지 그걸 하는 순간에는 일탈하는 것 같아서 통쾌했어.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치 창녀가 된 것 같은 기분 말야. 나도 타락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짜릿했어."

유심히 듣고만 있던 내가 물었다. "그런데 너네 말야. 할 때 다리에 힘은 푸냐?” 그 질문에 우리 모두 빵하고 터져버렸다. 우습게도 우리는 첫 섹스 이후로 여태껏 하체를 릴렉스시키고 편안한 마음으로 섹스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죄라도 짓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금기 따위 그녀 앞에 아무 것도 아닐 것처럼 보였던, 어둠이 밀려오면 쾌락의 탄성으로 가득 찬 밤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단 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조합, 묘하게 통하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는 아니었다. 혈액형도 네 명 모두 달랐다. 별자리도 우리를 하나로 묶지 못했다. 그러나 이·박·최 그리고 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장녀였다.



장남들은 공감할 것이다. 남자들에게 장남 콤플렉스가 있듯이, 장녀들도 알게 모르게 부모님의 기대를 짊어지고 자라게 된다.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인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까지 받은 우리들이었지만, 믿을 만한 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 온 시간 동안 자신의 즐거움을 먼저 추구하려는 마음은 억압되어 있었다.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그녀가 장녀라면, 그녀에게 믿음직스럽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녀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나눠들 수 있는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게 좋다. 그녀가 당신을 믿는다면 진도는 자연스럽게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섹스를 할 때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하는 장녀의 그녀라면 당신이 나서서 피임은 철저히 해주길 바란다.
섹스로 인해 그녀가 책임질만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안심한 그녀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신음소리도 삼키고 몸의 긴장도 잘 못 푸는 그녀에게 모든 즐거움을 몸으로 표현해도 좋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를 새로운 쾌락에 입문시켜 줄 수 있는 그대라면, 10점 만점에 10점이다.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여자는 언제 관계를 맺고 싶은가?'이다. 단순하게 '언제'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편하겠지만, 세상 모든 여자를 대변할 수 있는 답이란 없다. 그러나 섹스라이프를 시작한 이상, 여자에게도 하고 싶은 때는 분명히 존재한다. 육체적 쾌감 때문만이 아니라, 섹스가 주는 위로나 따뜻함은 정서적으로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언제 자발적으로 관계를 원했을까? '한 번만 하자'라고 칭얼거리지 않아도 그에게 가슴을 밀착시키고 그의 다리 사이로 내 허벅지를 밀어 넣으며 기꺼이 그를 흥분시키겠다는 적극적인 포즈를 취할 때는 언제였을까?

나의 경우에는 병문안을 온 그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을 때였다. 이 한 줄의 문장만 읽고 '유레카'를 외치며 감기에 걸린 애인을 찾아가 앓아 누워있는 그녀의 옷가지를 성급하게 벗기며 다짜고짜 덮치는 일은 없길 바란다. 그랬다간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그녀가 울컥하는 순간마다 '짐승새끼'라는 욕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부적인 사항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그녀가 아프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와 병원에 함께 가주고, 죽을 끊여주고, 약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자는 동안 뜨거워진 수건을 갈아주는 이런 행위들을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로맨틱하기엔 현대인은 바쁘다. 홀로 아픈 그녀도 그 정도는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동을 줄 여유가 없는 당신이라 하더라도 서러웁게 혼자 앓던 그녀의 감기가 차도를 보일 즈음엔 방문을 하도록 하자.

감기약에 취해 살짝 나른해 하고 있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는 마음을 반드시 표시해라. 이마를 다정스럽게 짚어보며 '열은 많이 내려서 다행이네'라는 말도 해주고, '혼자 아프게 내버려둬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반드시 해라. 그럴 때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춰주는 것도 좋다.

관계의 전 단계로써의 키스가 아니라, '차라리 내가 감기가 옳아 네가 빨리 완쾌되는 게 낫겠다'는 의미의 제스처로써 그녀의 입에 짧은 뽀뽀를 해주는 것도 좋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토닥토닥 해주는 것은 기본 옵션이다. 뭐가 이리 복잡하고 닭살스러운 거냐고 투덜거리지 않길 바란다. 그녀를 감복시킬수록 그녀의 빗장 해제는 수월하게 이뤄진다.

그랬다. 혼자 아픈 것도 익숙해질 때였지만, 마음을 다해 나를 걱정해주는 그의 모습은 믿음직스러웠고 섹시했다. 여자들은 '보살핌을 받고 있다' 혹은 '그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남자에게서 섹시함을 느낀다. 그런 느낌을 받을 순간은 각자가 각양각색이겠지만, 나에게 그럴 때란 바로 그의 병문안이었다.




'아프다고 한 거 거짓말 아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안았다. '나를 돌봐주어서 고마워요'라는 말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기약 때문에 몸의 감각이 내 것 같지 않아서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적극적이고 자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와 하나 된 즐거움 뒤엔 감기도 빨리 낫는 느낌이다. '감기엔 약보다 양기?'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효과가 금방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픈 나를 너무 배려해서, 그를 유혹하는데도 안 해주고 그냥 나를 재우려고 하면 서운해진다. 섭섭해지고 만다.

그러나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듯이, 이토록 섹시한 감기약에도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긴 한다. 그가 앓아눕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감기약과 함께 복용하면 효과가 극대화되는, 의사가 처방해주지 않아도 되는 근사한 약을 알고 있었다. 격렬하지 않아도 좋은, 조금 더 높은 체온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일상적이지만 섹시한 약을 복용하면 되니 감기 따위 문제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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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섹스가 끝나고 나면 귀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고흐와 같은 자화상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의 과한 키스로 축축해져버린 나의 왼쪽 귀. 침 속의 아밀라아제가 내 귀를 소화시켜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귀는 건조한 상태로 유지되길 원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귀를 핥아대는 것은 원치 않는 전희였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열심인 그에게 ‘그만해’라는 말로 분위기를 깰 순 없었다.

그 순간 알랭 드 보통이 쓴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책에 나온 구절이 떠올랐다. ‘자신이 좋았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실행하는 것이 사랑의 묘한 습성.’ 내 반응도 살피지 않고 이토록 집중해서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들뜬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침수 위기의 내 귀도 구조하기 위해 자세를 바꿔 그를 눕혔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눈·코에 차례차례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귀로 방향을 전환했다. 귓불을 혀로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바로 ‘사랑의 묘한 습성’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몸의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흐뭇한 그의 넓은 어깨와 등판이 공략 대상이었다. 그의 견갑골에 키스를 하면서 손가락으로는 척추를 쓸어내렸다. 특히 4번과 5번 척추를 지날 때는 힘을 조금 더 주어 자극했다. 그는 몸을 살짝 비틀긴 했지만 그가 만족해할 만한 애무는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임을 그도 알아차리길 바랐다. 나는 그의 옆에 등이 보이도록 돌아누웠다. 그는 나의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견갑골과 척추에 자극이 오길 기다렸지만 그는 뒤에서 나를 꼭 안으며 가슴에만 몰입할 뿐이었다. 그 순간 그를 발로 차주고 싶었다.


유독 특정한 부위에 성감이 확실히 몰려있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의 몸은 분위기와 사소한 배려 하나에 예상치 못한 부분까지 성감이 될 정도로 섬세하다. 그러한 몸이 하는 요구를 관계 도중에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손가락에서부터 천천히 내 팔 전체를 정성스럽게 키스한 뒤 나를 안아줘.’ 이런 식의 요구. 이런 설명적이고 긴 문구를 말하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이미 뇌에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의 남자에게 언어화된 표현은 수용되기 힘든 상황일지도 모른다.

여자들이 섹스 도중에 의사표현을 분명히 하거나 주도적으로 리드를 하는 경우, 어떤 남자들은 100%의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니라 49%의 의구심을 품는다. 섹스를 할 때 적극적이지 않다고 불만을 제기하면서도 정작 밤이 되면 뜨겁게 불타오르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 여자의 과거를 의심하거나 자신의 체력적 한계가 부담스러워서 꺼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 남자도 존재한다는 것을 여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자들은 섹스를 하면서 좋고 싫고의 자기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때가 있다.

그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면, 혹은 ‘여자가 어떻게 해주면 좋아하더라’라는 그 섬세한 신호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당신도 여자의 ‘묘한 습성’이 무엇인지 파악해보는 건 어떨까? 오늘 밤에는 당신이 늘 하던 순서나 방식의 애무가 아니라, 상대방이 해주는 걸 그대로 따라 해보길 권유한다. 상대방이 그걸 흡족해하고 당신의 의도를 파악한다면, 당신 역시 충만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촌스럽게 혹은 분위기를 깨며 물어보는 것 대신, 말이 필요 없는 이 몸의 대화를 통해 흡족한 섹스를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영화 '2012'에서처럼 지구가 온갖 자연재해로 망가진다면 살아남기란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두당 10억 유로, 한화로 대략 1조 7002억 원이 넘는 돈을 내면 거대한 방주의 탑승권을 살 수 있다는 설정이지만 웬만한 부자들이 아니고서야 다 죽게 생겼다.
 
고대 마야인들의 예언대로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시간은 고작해야 2년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내게는 스피노자처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연함 따윈 없다.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도 없다. 내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니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정해서 지구 멸망까지 앞으로 한 시간이 남아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지구 종말의 순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거나 전화통화를 하겠다는 선택을 했다. 기도를 하며 마지막 순간을 보내겠다고 말한 사람들도 3%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수치의 세 배, 9%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애 마지막 섹스'를 하겠다는 것. 10명 중 1명은 죽기 직전 섹스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선택했다.


 
나는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과 마지막 통화를 나눈 뒤엔 나만의 프로젝트를 실행할 것이다. 우선 마릴린 먼로의 분장을 할 것이다. 종말이 기운이 감돈다 싶었을 때 적금을 깨서 미리 사둔 고전적인 스타일의 금발 가발를 장착하고 페라가모에서 구입한 11cm 킬힐을 신을 것이다. 마릴린 먼로하면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지하철 환풍기 위에서 치맛자락을 나부끼던, 영화 '7년만의 외출' 속 그 장면에서 입었던 흰색 홀터넥 드레스도 입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애 마지막 복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죽을 테니까 범법 행위를 하나 할까한다. 내 평생의 호기심인 엑스터시 복용 혹은 마리화나 흡입을 해볼 것이다. 환각 상태에서의 섹스. 이성을 완전히 놓은 상태에서의 섹스를 해보고 싶다. 지구 종말이 아니라면 나의 뇌건강을 위해서 선택하지 않을 옵션 중 하나이지만, 죽기 직전이니까 미련 없이 과감하게 약을 삼키고, 연기를 빨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섹스심벌의 코스프레를 한 채 여성상위의 체위로 내 생애 가장 몽환적이고 야한 섹스를 할 것이다. 화산이 터져 당장 죽게 생겼는데도 섹스를 나누다 그대로 화산재를 덮어쓰고 그 형태가 보존된 폼페이의 '지금도 섹스 중인' 유적들처럼 그렇게 황홀한 황천길을 택할 것이다.

당신은 지구 최후의 순간, 어떤 섹스를 하고 싶은가?







아직 첫 키스도 해보지 않았던 스무 살의 봄, 친구의 기숙사 방에서 뒹굴거리다 그 녀석이 소장하고 있던 'Kiss'라는 만화책을 읽게 되었다. 남자 주인공은 헤비스모커에, 피아노를 잘 친다. 여자 주인공은 키스만으로 상대가 무슨 담배를 피는지 잘 알아맞히고, 키스를 할 때 그에게서 나던 희미한 담배냄새를 그리워한다. 이 책은 키스에 대한 망상을 키워주는 데에 한 몫 톡톡히 했다. 흡연자와의 키스. 그 만화책 덕분에 내게는 기대되는 일이 되었다.



마츠모토 토모의 KISS 중에서
 



세 번째 남자는 드디어 흡연자. 그는 던힐 맨솔을 피웠다. 키스를 했을 때 베이스노트만 남은 휴고보스의 머스크향과 만화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희미한 담배냄새가 어우러져 좀 더 흥분되었다. 좋은 키스였다.

그 후로도 입술에 남은 느낌과 그 때 맡았던 향이 그리웠다. 만화에서처럼 키스만으로 담배를 알아맞힐 수 있게 된 건, 보헴이라는 담배가 나왔을 때였다. 음주 시 몽롱한 기분을 좀 더 유지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흡연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선택했던 담배였기에 보헴을 피우면 그 특유의 향 때문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시가향이 옅게 배인 키스는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만화처럼 해냈다는 기쁨에 들뜬 애송이일 뿐이었다. 제대로 현실적인 헤비스모커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니코틴에 절은 냄새가 나서 조금만 가까이 가도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헛구역질이 날 정도인 남자를 만나보지 않았던 것이다.

거리를 두고 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올라탄 그의 차. 차 안에서 음악을 틀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3분 즈음 지나자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탁한 공기. 내 코는 유독한 냄새를 감지했다. 그가 말할 때 특히 심해졌다. 냄새의 근원은 그였다. 그러나 왜 냄새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잠깐 차를 세우더니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불쾌감은 배가되었다. 바로 담배가 원인이었다.

그건 지금껏 내가 맡았던 담배 냄새와는 차원이 틀렸다. 재떨이를 한 달간 비우지 않으면 날 법한 그런 냄새? 하루에 한 갑 정도 담배를 피운다는 남자들과 키스를 했을 때도 이렇게 지독한 냄새를 맡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별났다. 체질적인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은 알고 있을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것일까?

나는 도저히 그와의 키스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니코틴 냄새에 기절하든지 토해버릴 것 같았다. 그가 그 전에 연애를 하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나쁜 냄새였다. 그의 애인이셨던 분은 이 모든 고역을 사랑으로 참아내셨단 말인가? 열반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닐까?

실로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의 후각은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몸의 체취와 결합된 니코틴 냄새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정도라면 양치질과 구강청결제, 향수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흡연자라면 절대 할 수 없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흡연자와의 키스에 대해 환상을 가졌던 나를 반성했다.











20대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동생 방을 청소해주다가 책상 밑에 놓여있던 팩색에서 '원초적 본능'을 발견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개봉 당시엔 미성년자였기에 보지 않았던 영화. 무삭제 감독판이라니 호기심도 생기고해서 비디오의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전라의 남녀가 영화 초반부터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곧이어 여자는 남자의 몸 위로 올라타더니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어버린다. 그렇게 주도권을 행사하며 허리를 유연하게 사용하는 샤론 스톤을 보고 있노라니 살짝 호흡이 가빠지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자인 내가 봐도 흥분되는 섹스씬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에로틱스릴러 장르에서 이를 능가할만한 영화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영화 <원초적 본능> 중에서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내가 상대방을 묶는 건 몰라도, 내가 묶인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한 후배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저는 침대에 묶여서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남자친구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제가 변태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요?" 나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왜 묶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단순하고 간단하게 답하자면 늘 비슷한 패턴의 섹스가 재미없어진 것이다. 늘 하던 대로가 아닌 새로운 방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묶이는 것일까? 미디어에서 다루는 뻔하지 않는 방식 중에서 그나마 그것이 손쉬운 축에 속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위기구를 이용한 섹스, 애널섹스, SM플레이, 역할극에 비하면 실크스카프로 손목을 묶이는 게 덜 번거롭고 덜 부끄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에 밴디지를 이용하는 것이 '나 변태?'라고 고민할 문제인가? 둘이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했다면, 묶어놓은 상태에서 얼음송곳으로 찌르지 않을 것이라는 안전함이 보장된다면 무얼 하든 상관없다. 남들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지 않는가. 어떤 식으로 즐길지 선택하는 것은 둘이 결정할 문제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나는 묶이는 걸 원해'라고 말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관계라면 후배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둘 다 모험심이 강하고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타입이라면, 섹스를 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섹스만을 위한 관계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에다가, 한쪽이 섹스에 있어서 점잖은 타입라면 내 욕구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묶인 채로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변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말도 못하고 답보상태를 유지한다면 욕구불만의 게이지는 점차 상승하고 말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해보고 싶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설령 '에잇 변태'라는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안하면 된다.

의중을 묻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싫다고 했는데도 찌질거리며 하자고 매달리는 게 나쁜 것이다.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손을 묶는 정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불편이다. 변태적인 요구가 결코 아니다. 베개 밑에 숨겨놓았던 실크스카프로 그의 몸을 쓸어주듯 애무하며 교태를 부리며 말해보라. 그런 분위기에서 정색하며 싫다고 말한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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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스처는 확실했다. 키스를 나누다 나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의 팔에서 의지가 느껴졌다. 적당히 얇은 입술, 뾰족하고 단단한 턱을 지나 판판한 가슴까지 그는 나를 점점 아래로 보내려고 했다. 그의 몸에 딱 맞게 붙어 있는 팬티의 밴드 부분에 도달해서야 전두엽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졌다. 타이트하게 조여져있던 팬티를 벗겨내다 그의 페니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좀 더 핑크색이라면 좋을 텐데."

"그럼 넌, 결코 만족하지 못할 걸." 그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고요한 밤의 공기를 타고 나즈막한 혼잣말이 그의 귀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감정적인 반응을 잘 하지 않는 그였다. 그럼에도 발끈 한 건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페니스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거슬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고유의 색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 역시 타고나길 핑크빛 유두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페니스가 수줍은 핑크색이길, 그가 경험이 많지 않은 순수한 남자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 것 뿐이었다. 그렇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래로 내려갔던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오늘은 입으로 안 할래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그는 나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자신의 페니스가 핑크색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귀엽게 느껴지긴 했다. "베이비 핑크색의 페니스를 가진 남자는 아무래도 섹스 경험이 부족한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남자와의 섹스.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고 마는 남자를 네가 좋아할 리는 없다." 우리 사이에는 소용없는 감정적인 줄다기리는 집어치우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다시 자신의 페니스에 집중해달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의 페니스는 괜찮았다. 내 안을 빈틈없이 꽉 채우는 부피감이 느껴지는 느껴졌고, 내가 만족하기 전에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잘 했다. 다른 수식은 거추장스럽다. 그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나를 어떻게 다뤄야할지도 알고 있었다. 아니 여자를 잘 아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닳고 닳은 남자였다.

나는 그 능숙함이 지금 현재, 나에게만 제공될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안긴 순진한 부류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의 효용성에는 유통기한이 있었다. 그는 유통기한이 적힌 파인애플 통조림이 아니었기에 그 시기가 언제 올지 모를 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며, 우리가 쉽게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해줬더라면, 우리는 좀 더 오랫동안 섹스를 하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섹스로 가는 단계가 짧아졌다. 그에게 있어 섹스에 대한 욕망만이 순수한 영역이었다.
                                                                                                                                                                                                                                                                                                     그의 말대로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를 다룰 줄 모르는 남자에게는 흥미가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여느 여자들처럼 로맨스를 꿈꾼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왕이면 이번에는 영원한 사랑이 되길 바란다. 모순적인 태도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섹스를 한다는 느낌이 충만하길 바란다.

순간 이 남자와 무얼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스럽게 나를 지켜보았다. "이 일은 다음 번에 보상해줄게요. 오늘,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복잡한 마음으로 그에게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먼저 그곳을 나왔다.   

그는 섹스를 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기에 가벼운 관계라 할지라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은 무채색의 섹스가 아니라 핑크색의 로맨스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와 이제와서 사랑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몇 번의 로맨스를 통해 영원할 리 없는, 결코 일치되지 않을 사랑에 대해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버렸지만, 내게도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닌 로맨스에 의한 섹스가 필요했다. 그걸 느낀 순간에 몸만 즐거우면 된다는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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