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특별하지 않아. 그런 말로 스스로를 위협하고 싶지 않아.
그런 단어로 날 현혹해선 안 돼. 나에게 아주 유혹적인 단어이지만
나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기기 위한 거짓이란 걸 알고 있어.



유이는 연인이 아닌 남자 앞에서 옷을 벗은 건 처음이었고, 이 관계에서 도래할 감정, 예상하는 것보다 쓸쓸하거나, 기분 더러워지거나, 혹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걸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곧, 유이는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지 않으려고 만들어 놓은 가치관 따윈 이 관계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몸을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진짜 내가 원했던 것이 맞는 건지 그것은 또 올바른 것인지. 그에게 느끼는 쓸쓸함만큼 유이는 그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는 결코 바르게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작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호기심과 관심을 애정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그는 유이를 안은 뒤, 쉽게 유이의 손을 잡았다. 유이는 그때마다 그 손을 빼 주머니에 넣었다. 까탈스러운 여자애처럼 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몸을 섞었다고 해서 다음에 다시 자신의 몸을 만지는 일이 그에게 스스럼없는 일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 사람들에게 있어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잖아.

 

외로움이 밀려와도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뻔히 알만한 다른 여자 중 하나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오히려 더 나았을텐데. 그런 목소리로라면 차라리 받지 말지. 딱히 너랑은 전화로 할 얘기가 없다는 식의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고 그가 전화를 끊자, 유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가 쉽지 않았다.

- 관계라는 말에는 사이가 존재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뭔가 존재해야 관계도 유지된다구. 그런데 봐, 우리 둘 사이엔 뭐가 있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넌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긋고는 내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막고 있어. 내가 너에게 있어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없어. 하지만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가 특별하다고. 너야말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지. 적어도 내가 실수한 것 같다라는 기분은 들지 않게 해줬어야지.


-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행동은 외로움을 잊게 만들어 준다면 그걸로 가치가 끝날 뿐 그 행동 자체의 가치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의미를 두지마. 그 순간의 애정만 즐겨. 섹스는 친밀감을 높여주는, 혹은 친밀감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의 것이 아니야.


유이는 왜?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유이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왜? 왜? 라고 투정부리고 싶었다. 유이는 자신에게 특별하다 라는 말해놓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내버려두는 그의 태도에 진력나버렸다.

 

결국, 그를 재수없는 부류에서 정리하여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파일로 분류하고 손이 닿지 않는 책장에 꽂아 두어야 한다. 유이에게는 결단이 필요했다. 

유이는 그가 어른스럽다고 믿었다. 자신이 가진 애정을 마음껏 내비춰도 물러서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그걸 잘 조절해주고 처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미숙했다. 그에게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것이 우선 제일 마음이 아팠고, 사람에게 기대한 자신의 태도에 기대감을 줄일 줄 모르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이는 그에게 애정을 품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가 생각보다 자신을 가볍게 대한 것이 싫어졌다. 자세히 보면 비단 유이만을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가볍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유이는 생각하며 자신의 손상된 자아를 위로했다.

 

유이는 그에게 유일하지 않더라도 특별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 댓가로 쓸쓸함을 가슴에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유이를 찾아왔을 때, 유이는 감기약을 먹고 반즈음 몽롱해진 상태였다. 유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나른한 눈을 하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병문안이라고 하기엔 격정적인, 그렇게 몇 번이나 유이는 절정에 다달았다. 그의 몸에서 벗어난 뒤, 마른 타월로 온 몸에 송글하게 맺은 땀을 꾹꾹 눌러 닦아냈다.등을 돌린 채 잠이 든 그의 곁에 누웠지만 유이의 몸은 노곤함을 느끼지 않았고 감기약에 섞인 수면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정신이 말똥해진 유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쓸쓸한 등짝을 발로 밀어버렸다. 깨지않고 그대로 엎어진 채로 잠들어 있는 그를 그대로 밟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깨울 마음은 없었다.

 


유이는 CD를 하나 골라 재생시켰다. 이 밤의 배경음악 정도로, 그가 음악 소리에 깨지 않을 정도로.
아트 블래키의 앨범 Moanin' 중 3번 트랙 Are You Real
트럼펫과 색소폰의 조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어쩌면 지금의 상황과 그닥 어울리지 않을 선곡일지도 모르지만 도입부 40초를 계속 리핏해가며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일에 대해 유이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자, 미묘한 간격을 두고 일시정지된 유이와 그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전화통화를 하는 그. 유이는 그가 수신되어오는 음성을 듣고 있을 때 악질적인 장난처럼 그에게 키스를 했고, 대답을 해야할 때 즈음에는 그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유이의 그런 행동은 그를 좀 더 도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둘은 전화통화로 방해받은 시간을 보상이라도 해야하듯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다. 속이려 하는 자가 나쁘다. 하지만 그 순간 유이는 그의 비겁한 태도에 대해 질려하기 보다는 여자를 좋아하는 그래서 정기적으로 몇 명의 여자를 품에 안는 자신의 남자를, 그리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 여자애의 둔감한 직감을 경멸했다.

유이와 그 여자애는 서로 얼굴은 알고 있지만 말을 섞은 적이 없기에 엄밀히 말한다면 타인이라고 해도 좋은 관계였다. 생면부지는 아니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자신을 경멸할 빌미를 제공하게 된 그 여자아이가 가여웠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양"의 영역에 있는 여자들이 불쌍했다.
유이가 그에게 있어 "양"에서 "음"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순간
"양"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그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한다. 잡학(박학한 것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다식한 부류의 사람들은 타인의 결핍된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폭이 상대적으로 넓을 때가 있다.그 파장이 맞고, 포장이 교묘하게 눈을 가릴 때 사람들은 유혹 당한다.

유이는 타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것이야 말로 유이가 유혹자가 될 수 없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유이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고, 자신의 결핍에 대해 집요했다.

반면 그는 타인의 결핍된 부분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잘 간파했다. 결핍된 부분을 자신은 봐주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덫을 놓고 여자들이 자신을 갈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역시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유혹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내길 바라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들을 통해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충족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에게 어울렸으며 본인 스스로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달콤하게 키스를 하며 유이의 옷을 한겹씩 벗겨냈다. 나체가 된 유이를 일으켜 세워서는 벽에 밀어 붙였다. 벽에 눌린 가슴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유이의 머리채를 낚아채어 목을 젖혔다. '헉'하는 소리를 내뱉기도 전에 그는 거칠게 유이의 입술을 탐했다. 주저없이 그리고 탐욕스럽게 유이의 안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유이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그런 행동의 이유가 심연에서부터 밀려나온 충동이 아님을 유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가학적인 행동은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했다. 그는 유이에게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독창적이진 않았지만
그러나 욕심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이는 자신이 체험한 일을 미화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알고 싶었다. 추한 욕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게 만드는 매력. 그것을 탐닉해 나가기엔 겁 많은 자신. 질투라는 저열한 단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 관심. 애정.
어쩌면 허영심을 채워주는 경험.

 

그는 유이의 허영을 교묘하게 자극해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길 멈추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유이를 위로하기 위해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공감을 느낄 에너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유이가 고민하는 것 혹은 혼란스러워하는 것들에 대해 직면하는 것은 귀찮은 것이었다. 본질은 교묘히 피해나가면서, 기분 좋은 방식의 것으로 위로하는 척 하기. 그저 유이가 원하는 방식의 섹스를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유이는 스스로에게 위안이 된다는 주문 같은 걸 계속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둘다 표면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면을 부수고 뒤섞이게 만들 계면활성제 따윈 그 둘에게 필요치 않았다.유이는 멀리 떨어져있지 않고 밀착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라는 주문도 함께 외우고 있기 때문일까?

 
유이는 그의 마음을 추측할 뿐이다. 아니, 유이는 그의 마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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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는 이곳에 들어와 전체요리를 보조했다. 자신의 파트를 배정받을 때, 시작부터 설거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가야할 길은 멀지만.

주방은 식당이 문을 열기 몇 시간 전부터 분주하다. 정신없고 소란스러운 틈에도 유이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파스타 코너 쪽으로 눈길을 주곤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만들기에 그토록 감동스러운 맛을 내는 것일까? 친구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우연히 찾은 이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은 직후, 유이는 그 맛을 내는 비법을 알아내고 싶었다.

 


-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야.

 


전체요리 담당에게서 몇 번의 핀잔을 듣고, 주방의 흐름을 깨고 나서야 유이는 저도 모르게 돌아가는 고개를 자신의 일 앞에 고정시킬 수 있었다.

 


냉정해 보이는 콧날,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입가, 가끔씩 내뱉는 거친 욕설.

 


런치가 끝나고, 디너가 시작되기 전의 휴식 시간, 오늘은 요깃거리는 올리브 해물 파스타였다. 게다가 오늘의 요리 담당은 그였다. 유이는 그때처럼 감동적인 맛을 기대했지만 파스타에서는 정확히 훌륭한 표준적인 맛이 날 뿐이었다. 한 개인의 개성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주문된 음식이 아닌 것을 내어놓을 때는 레시피를 따른다? 후루룩 면을 빨아 당기면서 유이는 그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 글렀어.

 


배를 채운 뒤, 유이는 사교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주방과 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왔다. 주머니에 넣어놓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 그런 태도로는 

 


날카로운 눈매로 유이를 노려보던 그는 유이의 입에 문 담배를 빼앗아 툭 분질러 바닥에 내던졌다.

 


- 손님 입에 들어갈 식재료를 만지는 그 손으로 담배를 피는 건 용납이 안 돼. 부주방장한테 들켰으면 넌 바로 잘렸을 거야. 다행인줄 알아. 

 


그는 유이의 머리를 툭 가볍게 치고는

 


- 개념이 없구나. 너

 

라고 말을 하곤 유이가 뭔가 반박할 틈을 주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유이는 화가 났다. 그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전략 없는 자신의 소박함에 화가 났다. 좋은 요리사가 될 거야. 인정받고 말거야. 라는 바람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양식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화가 났다. 유이는 그가 내던진 담배를 주워 주머니 속에 넣었다.

 

 

 

 


교묘하게 잘 감춘다고 생각했는데 유이를 꿰뚫어 본 그의 한 마디.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유이는 오히려 맘이 편해졌다. 알고 있단 식으로 행동하기 위한 에너지를, 모르니까 배우겠다에 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누군가가 알아봐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후련한 기분.

 


홀에 들어서자. 몇몇이 모여 수다를 떨거나,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이의 눈은 그를 찾고 있었다. 홀에는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요리는 잊어버리고 쉬고 있는 그 시간에 홀로 주방에 서서 소스의 간을 보고 있었다. 그는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소금을 집어넣었다. 소스를 잘 저어 준 뒤, 그는 다시 맛을 보았다. 그는 만족이란 모를 것 같은 탐욕스러운 표정을 살짝 지었다. 

 


- 아까도 날 그렇게 쳐다봤지?

 


그 순간, 유이는 그가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이는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언저리에 닿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키스가 주는 자체적인 즐거움 때문이 아니었다.


- 너와 하고 싶었던 건, 네가 궁금했기 때문이야. 어떤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는 건, 내겐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 나는 너와 내가 키스하는 그런 날을 상상하고 있었어.



유이는 재수없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가진 매력을 쉽게 무시하진 못했다.

그는 유이같은 여자를 다룰 줄 알았다. 아니 다양한 타입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여자들을 어느 선까지는 잘 다뤘다.

그와 키스를 하고도 한참 뒤에야 안 일이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여자도 꽤 있었다.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자신감을 가진,  웃는 얼굴이 귀여운, 그러나 눈물이 그렁 맺힌 눈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스물 한 살 홀 서빙 아르바이트 여대생은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저 고백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 그의 여자라는 자리까지 차지했다. 물론 조건은 간단했다. 일하는 공간 내에서는 티내지 않기. 그 여자아이는  조건을 잘 이행하면서도, 그와 관련있음직한 여자들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난 뒤 여자 탈의실에서

그와 소문이 무성했던, 그러나 결정적인 뭔가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홀 매니저와 관계가 수다거리가 되었다. 홀매니저는 소문일 뿐이라며 그런 얘기는 곤란하다고 말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듯 두 볼이 상기 되었다.  어리기 때문에 용기가 넘쳐나는 - 어쩌면 그 용기가 현명하진 않은 것일수도 있지만 - 여자 아이는

 - 어릴 때부터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와 어울리는 여자는 어딘가 마녀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우리 매니저님은 그런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뭐 돈없고, 어린 남자애들은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편안한 나이 많은 여자를 좋아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설마, 그 사람이 어린 애도 아니구 말예요.
그런 소문이 왜 났는지는 이해가 안 되지만, 소문이라고 하기엔 심한 농담같은 구석이 있는데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웃는 건 그 여자아이 밖에 없었다.
홀 매니저는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배신감이나 분노가 밥벌이를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홀 매니저는 다음 날에도 다음 다음 날에도 평소도 다름없이 출근을 했다.

 

 

매주 같은 시간, 같은 테이블에 앉아 오늘의 파스타를 주문하던, 그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던 손님 하나는
어떻게 직감을 발휘했는지 그 여자애가 테이블을 담당해서 서빙을 할 때마다 못 잡아 먹어 안날난 사람처럼 괴롭혔다.
휴식 시간, 건물 옥상에서 여자아이는 그의 품에서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고, 그는 그 눈물을 핥아주었다.
그 장면을 유일하게 목격한 유이는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와 키스를 하면서 유이가 그토록 흥분했던 것은
그의 키스가‘초대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들여다 본 적 있겠지만,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을 그에게로의 초대.


고소한 크림소스와 야채향이 뒤섞인 키스가 격정적으로 바뀌었다.

 


- 이런 유치한 말을 하게 될진 몰랐지만, 너 맛있어.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유이는 그에게 왜 그랬냐고, 그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따져묻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이는 그와 유이 자신 둘 사이의 관계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 너, 애인 있는 남자와 또다시 키스해도 괜찮아?

유이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힘이 실려있진 않았다.

 

-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그리고 먼저 내게 키스한 건 너야.

- 처음부터 말했으면, 너와 키스할 수 있었을까?

- 글쎄, 잘 모르겠어. 나라면 하지 않을 일에 속하지만, 너였으니까. 그냥 나는 네가 좋아.

 

- 들키지 말자.

 

유이는 응이라고 대답하면서, 그 순간에는 그 일이 누구를 위해 좋은 일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키스를 계속 받을 수만 있다면 좋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뇌가 정지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스물 한 살짜리 여자아이가 - 그 아이가 사랑을 믿든 그렇지 않든 간에 - 이 사실을 알면 상처받을테고, 둘의 관계가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린 그가 유이 자신에게 소속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여자아이를 위해서 들키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유이는 어느 순간, 진짜 이유를 알아버렸다.누구에게도 버림 받고 싶지 않은, 이별 따윈 견디기 힘들어 하는, 자기 자신이 상처받는 걸 제일 두려워하는 건 바로 그 였다.

그는 어떤 관계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들키지 말자라는 말은 결코 유이를 위한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홀 매니저에게도 그렇게 말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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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 잘 한다

-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말 기분 나빠.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문장이라고 하더라도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그리고 네가 일반의 도덕률로 날 평가하는 것도 우스워.

 

- 이런이런, 채식주의자들은 감정을 격앙시키지 않는다면서 
 

-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 동물이 도살 당하면서 느꼈을 불안, 분노.
뭐 그런 기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 사람치곤 별거 아닌 단어에 격렬히 반응하니 의외라서?

 

- 아니, 네가 일부러 날 도발 시킬 의도로 던진 말이니까, 네 뜻대로 반응해준 것 뿐이야. 재미있어?

 

- 이런 반응은 재미없는데. 한 번 더 할까? 그런 감정이 섹스로 이어지면 재미있을 것 같아.

 

- 이런 감정으로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암컷 사마귀처럼 조각조각 널 먹어야 풀릴 것 같거든.

 

- 드디어 채식 포기? 풀만 먹는 거 그만해. 내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줄게. 응?

 

 

 

 

 

유이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안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장난스러웠다. 

나쁘다라는 수식어는 참으로 섹시하게 들린다. 나쁜 남자. 하지만 늘 나쁘기만 하다면 어떤 여자가 그의 곁에 붙어있겠는가? 나쁜 남자는 달콤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유이는 이해 불능인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쓸쓸함이란 서로에게 약간의 애정과 서로에게 맞은 표현 방식만 가지고 있다면 최소화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노력하지 않았다.

 

유이는 말을 믿지 않는다. 특히 그가 하는 말들. 귀에 걸리는 달콤한 말은 언제나 유이의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들뜬 깊이의 두 배가 넘는, 아주 깊숙한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몸을 합친 사이라면 더욱더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자신을 열어보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유이에게 상처가 될 말을 정확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던졌으며, 자신을 꽁꽁 싸매고 아무 것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유이는 그를 안을 때마다 슬펐다.

 

그는 물과 같았다. 어느 새 유이 곁에 차 올라 있었고, 벗어날 수 없게 유이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발버둥칠수록 깊이 빠지는, 그 물에 유이는 자신을 내맡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온하게 물 위에 떠 있으면서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가라앉고 있었다.

 

유이는 그가 품에 안는 네 명의 여자 중에 하나였다. 유이는 노력해서 다른 여자들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수가 보이게 행동했다. 어렴풋이 그 여자들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유이와 그가 있는 세상은 협소했고, 둘은 공유하는 공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이가 채식주의자가 될 거야. 라고 말한 그 날 밤. 모두다 퇴근한 고요하고 차가운 주방에서 그는 새우나 베이컨을 대신해서 버섯과 브로컬리, 그리고 콩을 넣어 유이가 선호하는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었다. 유이는 그릇에 묻은 크림 소스를 한 방울도 남길 수 없다는 전투의지를 품은 사람마냥 긁어 먹었고, 그는 유이 입가에 묻은 크림을 핥아 먹었다. 그 둘의 첫 키스는 신선한 야채와 우유 냄새가 났다.

 

 

- 엄밀히 말하면 유제품도 먹어선 안 되는 거 잖아?

 

- 네가 날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 준 건데, 먹을 수 없어. 라고 할 순 없잖아.

 

 

 

유이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품었는지는.

그러나 유이가 그를 원했다는 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이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버렸다. 몰두하고 있음.

 

- 너 나랑 할 때, 요리 하면서 짓는 표정 짓는 거 알아?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그래서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힘들어.

 

- 네가 나가면 되겠네. 나는 여기서 수석 요리사가 될 때까지 버틸 거야.

 

- 날 내보내고 싶은 거야?

 

- 상관없어. 네가 있든 없든. 넌 내 경쟁자는 아니니까.

 

- 윽, 상처 주는 말인데.

 

- 그 정도로 상처 따윈 받지 않은 거 알아. 진짜 상처가 되었다면 상처 받았단 말도 안 할 거잖아. 넌.  

 

 

 





유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등 뒤로 한 채, 벗어놓은 속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는 다리를 쭈욱 뻗어 엄지발가락으로 유이의 등뼈를 쓸어내렸다. 유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내가 쓸쓸해지는 일 따윈 그만 할래. 이제 오지마.

 

그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유이의 말을 농담처럼 여겼다.

 

- 넌 실력도 있고 스카웃 제의도 많이 받으니까, 아예 다른 레스토랑으로 가 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 편하자고 그런 걸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까, 지금 일어나서 나가주면 좋겠어.

 

그는 이내 먹던 과자를 뺏긴 아이처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소용없어. 이제 안 통해. 그런 표정.


- 제법 잔인한 구석이 있다

 

- 그렇게 만든 건 너야. 우리 관계를 항상 먼저 포기한 건 너였어.

그 뒤에 힘겹게 추스리고, 눈물을 닦고, 쓸쓸함을 이겨내고

이런 모든 과정을 나는 너와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 해냈던 거라구.

   

- 당신, 쎄구나.

 

- 내 말투 따라 하지마. 특히 그 당신이라는 말. 하지마.

너한테 그건 오직 너 하나를 가리키는 2인칭이 아니라 당신이 웃어준 다수 여자들을 향해,

모두들 그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게 만드는 주문 같은 거잖아.

난 그런 뜻으로 그 단어 쓴 적 없어. 그러니까 어설프게 따라 하지마.

 

- 왜 그래? 너답지 않게?

 

- 내가 누군데? 넌 내 이름을 불러준 적도 없어. 넌 나다운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넌 나를 통해,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너의 필요를 충족시킨 것 뿐이지, 나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순간은 없었어.

 

-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더 많이 예뻐 해 줄게.

 

- 이제 필요 없어, 그런 거. 너도 내가 하는 말 하나도 신경 안 써도 돼. 나 역시 네가 나를 피곤한 여자라 생각하든 말든 전혀 관심 없으니까.

 

유이의 목소리엔 흥분도,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수도 없이 연습해서 기계처럼 딱 맞아 떨어져 버리는, 그런 건조한 말들의 연속이었다.

 

- 어차피 너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내 이름이 그렇잖아.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유이하지. 네가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면, 겁 내지말고, 몸 사리지 말고 네가 먼저 사람을 마음으로 좋아해 봐.
상대의 마음을 홀리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좋아해주라고. 계산적이잖아. 상처받을 마지노선이 조금이라도 보이려 하면 도망가고, 어쩔 때보면 넌 흑심만 있는 연필 같아. 말만 잘하지 궁극적으로는 하룻밤 품에 안고 잘 따뜻한 여자를 구하는 거 뿐이잖아.
너 매력있어. 상당하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넌 알면 알수록 건조해서 부서져 버릴 것 같아. 혹은 타인의 감정이나 슬픔 따위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동조도 할 수 없는 사이코 패스이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어. 네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바로 그런 유형일 거야.

 

유이는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 베풀어 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감정적으로 궁핍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몸보다 마음을 먼저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자기 곁에 오래 두지 못하고 금세 싫증을 내거나, 지친 여자가 먼저 떠나간다는 것을.

 

네 명의 여자. 그 중에 유이는 마라톤을 하듯 가장 오래 버텼지만.

그 길에서 유이는 자기가 완주해야 할 코스는 이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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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지 않을 핸드폰 벨소리였다.

그 그룹에 들어간 번호는

한 번도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마무리가 덜 된 업무로 인해 퇴근도 못하고

쌓이는 눈의 피로감 때문에 커다란 책상에 축 늘어져 엎어져서는

내 방의 퀸 사이즈 침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침대의 이불에 맨살이 닿는 느낌을 상상하며 멍해져서는

정말 그게 내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응? 고개를 돌려 반짝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그제서야 발견하고서는

아, 이 아이가 지금 울고 있구나.

낯선 벨소리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준이었다.

의례적으로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밥을 한 번 같이 먹긴 했지만

가끔 서로의 다른 일행들과 술을 마시다 합쳐지는 술 자리에서 술 잔을 부딪히긴 했지만

결코 이 시간에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사적인 사이가 아니여서

참 의외의 발신자네. 라는 생각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요?

노곤노곤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

 

 

나도 모르게 내일 아침에 진행할

신경이 예민하다고 소문난 인터뷰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긴장했었나보다.

 

 

 

 

아, 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책 읽으면서 맥주 한 캔 마시고 있었어요.

 

 

아, 반갑네요. 이렇게 전화통화를 하게 될 줄이야.

 

 

반갑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사람 목소리가, 오로지 나와만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의 목소리가 참 그리웠는데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잘 지내죠?

 

 

 

 

수화기 넘어로 얕게 깔려있는 음악이 넘실거리며 내게 전해졌다.

한 때 꽤나 중독되어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色彩のブル ス.

준과 어색하게 첫 인사를 나누었을 때도 흘러나오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준은 자신의 현재 근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는 요즘 살이 좀 빠졌어요.

 

 

그러면 안 되죠. 또 얼굴살 엄청 빠진 거 아니예요?

 

 

아, 마지막에 봤을 때 그때보단 살이 좀 붙었었다가 지금 다시 빠지고 있는 중.

머리도 눈이 보이게 잘랐어요.

 

 

아, 머리 길 땐 강아지 같았는데,

 

 

으흠. 그랬나요?

오랜만에 쉬면서 CD를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근교로 드라이브를 하러 갈 때, 

준도 일행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원래 운전을 맡기로 한 친구 녀석이 약속을 취소하면서

준을 투하시켜 놓고 빠졌던 것 같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뒷좌석에 앉은 녀석들은 다 골아떨어지고

웬만해서는 움직이는 것 안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선곡이 좋으네요.

 

 

그 CD, 가지세요.

 

 

준은 조용히, 그리고 참으로 안전하게 운전을 했고

나는 조용히, 그리고 참으로 심심하게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이 참 좋았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은 뭐랄까. 내가 빠져들고 마는 그런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준도 나를 좋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특별히 남다르게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준이 빠져들만한 그런 타입의 여자는 아니었다.

 

 

뭐랄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데

연인은 되지 않는.

 

 

그렇다보니 서로에게 살가울 필요도 없고.

애써 잘 보이기 위해 서로에게 내뱉는 말에 슈가코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고 받은 말들은

건조하고

또 간단했다.

 

 

 

준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또 한 번,

아, 좋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낮게 깔린 참 듣기 좋은 목소리.

남자의 그런 목소리는

오늘 같은 날엔 피로회복제 같은 것이다.

 

오해하지 않고, 그걸 즐길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좋았다.

 

 

아마 준에게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가 그런 효과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워요. 전화해줘서.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곤할텐데 어서 자요.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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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책이 없다. 출근길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울어버리다니, 그러나 내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니 새삼 지금에 와서 부끄러울 건 없다. 그러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내 모습을 비추고 있던 지하철 문이 열렸고 하필 논현역에서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도영 씨가 지하철을 탔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나는 문 가운데 서 있었고, 도영 씨는 지하철을 타려다 울고 있는 나를 목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넋 나간 것처럼 헤- 웃으며 여기서 타는 군요! 라고 말했다. 도영 씨는 내 뒤에 서서 네. 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행이야. 옆에 서지 않아서. 고개를 힘겹게 뒤로 돌려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지. 뒤에서 느껴지는 도영 씨의 가늘고 긴 몸에서는 여름의 풀잎 냄새가 나는 듯 했다.

혹시 도영 씨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을 걸지도 모르니까 왼쪽 귀의 이어폰을 뺐다.
'너가 좋아했던 살구빛 샐러드 그날은 샐러드 기념일'
순간 그런 닭살스러운 노래가 새어나와 지하철 안에 얕게 퍼졌다.


 

이건 에쿠니가오리 탓이다.
<호텔 선인장> 때도, <홀리 가든> 때도,
<반짝반짝 빛나는 때>는 아예 엉엉 소리내며 울어버렸다.

나는 신지에게 녹신녹신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람피우는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됐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인간은 바람을 피우지 않곤 살 수 없는 생물이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전심전력으로 녹신녹신해진 채 태연히 살아갈 순 없다.


라는 문장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이 여자 뭐야. 무장해제의 상태인 나에게 미끄렁거리며 다가와서는 찌릿하고 감전시켜버린다. 전기가오리 같은 여자.

 

 


 
직장에서 가까운 집을 내팽개치고는 무작정 희우의 집으로 들어왔다. 희우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희우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집과 재산, 그리고 어마어마한 보험금까지 받았다. 3인 가족이 살기에도 커다란 아파트. 희우는 나에게 우리가 함께 잠들 침실을 보여주었다. 서재로 쓰고있는 깔끔하고 아담한 방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 옷을 수납할 수 있는 빈 옷장과 잇몸 건강에 특히 도움을 줄 것 같이 생긴 칫솔을 내주었다.



밝아오고 있다는 걸 몸이 먼저 느낀다. 아침이 오는 것이다. 몇 분 혹은 몇 십 분 후에는 알람이 미친듯이 울리겠지. 나는 희우의 등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킨다. 희우는 잠결에 돌아누워 나를 꼬옥 안아준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희우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넣는다. 따뜻하다. 36.7도의 따뜻함이었다. 사람의 정상체온 36.7도 정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희우를 만나고 나서부터 내 몸의 온도는 서서히 상승해서 튀김을 튀겨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희우의 체온은 36.7도 정상인듯 했다.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희우와 떨어지기 싫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나는 성실한 회사원 모드로 출근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알람이 울리는 유예 시간이 올 때까지 희우를 꼭 붙들고 있는다. 희우는 그런 맘도 모르고 잠에 취해 건성으로 나를 안고 있다. 토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커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프로젝트를 하나 더 맡았다. 
바빠지기 위해, 정신을 혹사시키기 위해 일을 늘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머리 속은 온통 희우 생각으로 가득 찬다. 뭘 하고 있을까? 점심은 뭘 먹었을까? 누굴 만나고 있을까?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규격화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나에 반해서 뭘해도 상관없는, 굳이 뭘 해야할 필요도 없는 희우의 삶은 나에게는 물음표 투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의 하루로 인해 나는 미칠 것 같은 불안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를 때 즈음
희우는 일어나서 얇은 이불을 둘둘 말아 바닥에 끌며 화장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뒤에서 안아준다. 나는 몸을 살짝 돌려 팔로 희우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그의 배에 귀를 가져다댄다. 이렇게 희우의 몸에 매달려있으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그의 내장이 내는 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아 안타까워진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몸을 떼어내니 희우가 말한다.

"꼭 출근해야 해? 어제도 회의한다고 늦게 들어왔잖아."
직장생활을 해 본 적 없는 희우는 저런 말을 잘도 내뱉는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지만, 희우가 책임감없는 남자가 될까봐 겁을 먹는다.난 말야, 잘하는 남자도 좋지만 맡은 바 일에 충실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가 좋아.
"내 얘기하는 거야?"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희우의 말에 불안한 내 마음이 묘하게 진정되었다. 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그의 견갑골에 입을 맞춘다. 진분홍색 입술 자국이 남은 그의 하얀 속살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아림은 이번에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부연 설명 따윈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꿰뚫어본 것처럼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푹 빠져 있으니까 말야."

 



산 미구엘을 비우고 레페 브라운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재윤은 자신이 피우던 쿠바산 시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한 번 해봐요."
맥주의 기운 때문인지 선뜻 그걸 받아들고는 가볍게 빨아들였다. 시가의 향이 나쁘지 않았다.

퇴근을 하면 6시. 일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희우 품에 안기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한다.
밀리는 버스도 싫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녹초가 되는 것도 싫다. 순간이동을 해서 곧장 희우 곁으로 가고 싶어진다. 희우의 냄새를 킁킁킁하고 맡고 싶어졌다. 이런 내가 모자르고 바보같아서 배회하다 들어간 곳이 재윤이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재즈바였다. 몇 시간을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호가든을 마셨고, 아사히도 비웠다. 취하진 않았다. 재윤은 Inger Marie의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바를 사이에 두고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너무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쓸쓸해지고 자신없어지는 이 아이러니를 견딜 수 없다. 나는 조금씩 몸을 뒤로 뺀다. 재윤은 조급히 그만큼 몸을 밀어붙인다. 재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 블라우스 셔츠의 단추를 푼다. 내 몸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 재윤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나를 연출할 수도 있고, 타고난 재능대로 그를 놀려줄 수도 있다. 희우 앞에서는 무능한 상태로 녹아내려버리고 마는 내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존재를, 나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재윤과 잤다. 아니 섹스를 했다.

 


아림은 자다라는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대신 행위만을 의미하는 <섹스>로 교정해주었다.
"뭐 어때. 좋았으면 된거 잖아."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꽤 거칠 것 같았던 재윤은 의외로 섬세하게 나의 반응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가학적으로 나를 탐했다면 그 순간 멍청한 나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윤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희우와 나는 천생연분이었다. 처음 해 본 연애였지만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나한테만 딱 맞는 것이었다. 희우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격정적이지 않았고, 일상적이며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독하게 고독해지는 까닭은 희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아무 것도, 아무 의미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희우가 재윤에 대해서 안다면, 도영 씨에 대해서 안다면, 일본에 출장가서 만난 타쿠미씨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슬퍼질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photographed by Patrick Demarchel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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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은 바닥에 가득한 풍선들을 발로 툭툭 차며 들어왔다.
"
뭐야, 이것들은
?"

너한테는 말해줄 수 없는 것! 혼자 속으로 외치곤 희정이 건네준 기름기가 베어 나온 튀김봉투를 갈랐다. 희정은 답이 없자,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며 입을 삐죽거렸다.

 

료와 먹을 땐 고소하고 바삭한 맛있는 튀김이었는데 말야.
"
그런 소리 내뱉을 거면 왜 사람을 생고생시킨 거야
?
상수역에서 너네 집까지 튀김 냄새가 진동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사왔더니. 먹지마
!"
포장해서 들고 오는 동안 식고 눅눅해졌기 때문에 맛의 차이가 나는 게 아니었다
.



나도 알고 있었다. 희정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
희정은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열이 받아서는 료와 나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료와는 4년째 연애 중. 앞으로도 별 일이 없는 이상 그와 연애를 지속할 것이다.
둘이 함께 살 계획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이라는 성취단계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불투명하다
.
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료나 내가 하는 일이 바쁠 땐 만나지 못하는 시간의 터울이 길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희정이 정의하는 연애에서 보자면 무심하기 짝이 없어서
희정은 료만 떠올리면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진다.


"지금과 같은 상태, 잘도 견딘다
."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방식으로 나를 내버려두는 ''를 사랑하는 내가 못마땅한 것이다.

 

료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부드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엄살부리는 것을 받아주고 토닥거려 줄 정도로 너그럽지는 않다
.
료는 서로가 시간을 많이 공유한다거나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싫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자기 몫의 외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게 하지 않으려면 그걸 즐기라고 했다.

 

"그 정도로도 만족이 되는 거야?"
우리는 떨어져있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깊고 묵직한 사랑을 나눈다.

 

료는 수컷 늑대 같은 면이 있다.
출신 직전의 암컷에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정하게 군다
.
새끼들이 어미 몸 밖으로 밀려나오고 하나,둘 굴 밖을 무사히 걸어 나오게 되면 그런 행동도 끝이다
.
암컷이 임신하고 있을 때는 먹을 것도 가져다 주던 수컷은

암컷이 몸을 풀고 나온 뒤, 사냥한 먹잇감에 먼저 입을 대려고 하면
혹독하게 암컷을 위협하고 서열을 재확인시켜준다. 둘은 독립체가 되는 것이다
.
다행히 료와 나는 서로 동등한 서열이다.

 

"내가 보기엔 네 긍정 에너지가 과도한 것 같아."

 

하지만 항상 먼저 료가 달려드는 걸
어쩔 땐 료를 위해 일주일 전부터 고르고 골랐던 속옷을 보여줄 여유도 없이
나에게 달려들어 우리 사이에 거추장스러운 그런 것들을 후다닥 처리해버리고는
하루 종일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도 있어.
배가 고파서 탈진할 정도가 되면
료는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서 침대로 가져온다구.
그러고 나면 료는 내게 양치질할 시간만 줘.

 

희정은 그걸 의무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에게 안기면 의무감은 느낄 수 없다.
의무감만으로 날 안는다면 예민한 나의 몸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에게 안겨있으며 끝없이 긍정할 수 있는 기운을 받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니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들해지지 않고 잘 지내는 거야.
우리가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게 될 수 없어. 특별하지.
료와 함께 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오감을 집중하게 돼.

 

료와 48번을 만나면서 수치적 데이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겠지만
각각의 데이트에서 느낀 감정은 생생하게 몸에 기록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불러일으킬 수 있어.

 

그렇게 말해도 희정은 료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료 앞에서는 곧잘 강해진다.
그러나 료가 만나고 난 뒤, 혼자있게 되면 꼭 며칠동안은 안절부절 못하고 감정기복이 심해진다.
내가 그렇게 되는 걸 희정은 알고 있다.
희정은 애정결핍 상태가 되어버린 내가 보기 싫은 거였다.
그러나 나는 ''를 사랑했다.
며칠이 지나면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료를 기다리는 행복을 누린다.

 

"그런게 사랑이야? 내가 보기엔 가끔식 욕구를 채우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인, 허울좋은 구실인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료가 곁에 없는 나는 약해빠졌으니까.
하지만 나의 불행을 자초할 순 없어.
료와 헤어지지 않는 이상, 선택권 따윈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료의 애정을 믿는 것 밖에.

 

희정의 긴 잔소리 끝은 명함 한 장이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료를 넋 놓고 기다리지만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보라고 했다.
료만 만나니까
세상에 그런 나쁜 놈에게 동화되어
더 근사하고 나에게 집중할 남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거라고 했다.

 

희정이 돌아가고 혼자 방에 남은 나는
적당히, 알맞게 공기가 빠진 풍선을 골랐다.
그리고 풍선 주둥이 쪽에 가위로 살짝 구멍을 냈다.
풍선에서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붙자 풍선은 팽그르르 돌며 자기 안의 공기를 내뱉었다.

 

료의 숨결

.
료의 이산화탄소

 

 

료가 잔뜩 불어놓고 간 풍선에 구멍을 바람을 빼내며
나는 료가 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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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화를 내며 던져버렸던 선풍기는

다행히도 부서지지 않았어.

여름 밤의 온기를

식혀주는 바람을 여전히 만들어 내고 있어.

물론 예전보다 털털털거리는 소리를 좀 더 크게 낼 뿐이지.

선풍기 바람은

눈물도 말려주지.

 

 

 

 

서로에게 서로가 보이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닿지도 않는 말을 하고

 

서운한 것이 많아.

하지만

한순간도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지.

그게 참 슬퍼.

 

 

 

슬픈 일이지.

널 견딜 수 없다면

즐겁지 않다면

쉬울 수도 있었을텐데.

 

 

 

 

타이밍이라는 게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면

항상 최악.의 타이밍이지.

 

내가 우울할 땐

너도 우울해.

그래서 나를 달래줄 기운 하나 가지고 있지 않지.

투정부리고 싶은데

애써 밝은 목소리를 가장하고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던진 질문은

너의 짜증을 가중시키고

넌 나쁜 목소리로 대꾸하지.

 

 

 

나는

조용히 조용히

가라앉아서는

 

'아, 질릴만한 여자.'

 

나 자신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지.

 

그 말이

나를 더욱더

질리는 여자로 만드는 것인지도.

하지만 실은 사랑받고 싶은 거잖아.

 

 

 

 

알아. 이런 기분일 땐

파헤쳐선 안돼.

그 기분을 분석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울해지지.

그냥 눈물을 흘려. 소리내서 울어.

이런 기분일 땐

누군가 대화해서도 안돼.

상처받을 수도, 되려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상태니까

 

 

그런데 왜 나는

머리로 아는 것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주파수는 너인걸까?

아프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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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S랑 잘 거야."

K의 이런 발언에 놀랄 친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K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은 까닭은

그 대단한 결심을 선포한 곳이 거리낌 없이 Girl Talk를 나눌 수 있도록 공간 분리가 잘 되어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보다 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전시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은 미술관이라서 당연히 K의 무리에게 불편한 시선이 모였다.

이런 K의 단순한 성격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좀 작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미술관 옆 카페테리아로 K를 끌고 나온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우정은 무관심한 일에도 적절한 관심과 코멘트를 필요로 한다.

"S? 그 S? 애저녁에 헤어졌잖아?"

"그 새끼를 다시 만나겠다고?"

"다시 만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 거라고."

 

K와 S는 이미 3년 전에 헤어진 사이였다.

헤어졌다는 말보단 K가 일방적으로 차였다고 하는 게 옳은,

한 줄로 그 관계를 요약하자면 “K보다 나이도 어린 S가 순진한 K를 데리고 놀다 버린 것이었다.”

 

뭐, 여기서 순진함이란 마음이 꾸밈없고 참된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도 그 의심을 억지로 지우고 자신이 세워놓은 사랑의 정의를 믿는 순진함이었다.

S와 관계에서 처참히 박살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신되지 않는 전화를 걸고,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불면의 밤을 수없이 보내고,

자신의 괴로움을 반복적으로 토로하면서 친구들을 괴롭혔지만 친구들은 그런 K를 미워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각박한 세상에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죄악이라며, 자신의 눈을 핑크빛 하트로 만든 남자를 찾았다고 했다.

 

 

 

 

 

"너, S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사랑이 아니란 걸 알아. 사랑하지도 않아. S도 날 사랑하지 않아. 우린 솔직하지 못했어.

서로 원하는 건, 몸뿐이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난 무서웠거든. 그런 선택을 한다면 사랑을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속여서라도 S를 사랑한다고 말해야했었어.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나에게 최면을 걸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도 돼.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싶어. 사랑은 그렇게 얻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것이라도

욕망하는 것을 손아귀에 쥐고 싶어."

 

 

 

"어떻게 다시 만나려고?"

 

인생은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걸 L,M,N의 남자들을 만나 오면서 깨치고도 도가 텄을 K임에도

머릿속으로 짜놓은 시나리오들을 줄줄이 읊어낸다.

K의 구성은 그동안 읽어왔을 삼류연애소설의 변형 판이었지만,

그 순간 K는 절실해보였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별 후에는 자학 증상이 나타나긴 한다지만 이건 좀 수위가 높아. 감정적으로 더 망가지려고 작정을 한 거야?"

 


"나도 자신 없어. 다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순 없어.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그 사랑이, 내게 치명상을 입힐 준비를 하고 벼르고 있는 세상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잖아.

난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던 대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현실감 있게 원한 적이 없어.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지도 않았어. 내게 입 맞춰 주는 입술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남자들의 페니스도 똑바로 본 적 없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게 되면, 구두 뒤 굽을 두 번 톡톡 치면

캔자스 외딴 시골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도로시가 되어버릴 것 같단 말야.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 10cm는 붕 떠있는 그런 관계

아직 정해진 게 하나 없는 불안한 어린 영혼인 나에게 사랑은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환각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어.

내게 사랑은 엑스터시나 LSD같은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 사랑이 나에게 치명타를 날렸어.


너희들도 알잖아.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순간, 그 순간들이 날 어떻게 배신했는지.

그 사람이 내게 원한 것은 현실이겠지만 난 그렇게 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쳐갔겠지.

 

알아. 내가 잘못한 걸 알아.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현실이 힘겨웠다고

그래 지금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지금의 내 상태도 현실에서 더욱 더 도망치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아.

난 이 세상에 당당하게 발을 붙이고 서 있기엔 나약하고 존재감마저도 미약하니까.

그나마 S를 원하는 건, S의 그것을 내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이잖아."

 


자기변명 밖에 지나지 않는 말들을 내뱉는 K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친구란 이름으로 K의 계획을 들어주며 동조해주거나

그 계획이 무산되거나 트러블이 생겼을 때 술 한 잔 기울여주면 그만이다.

 

이러니저러니 하며 K를 걱정해주는 것도 k의 귓가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동의만을 바라는 K에게 뭔가 충고를 하면

K는 자기 합리화의 대사를 읊어낼 것이며, 그걸 들어주는 것이 더욱 귀찮은 일이었다.

 

그때였다.

 

"사랑은 진정,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패가 될 수 없는 거니?

그럼 너는 이제 사랑을 믿지 않는 거지? 더 이상 사랑이니 뭐니 그런 말에 기대하지 않을 거지?"

예상치 못한 반문을 받은 K는 당황했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을 믿는 게 두려워.

적당히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래."

 

 

"넌 여기 와서 붕 떠있는 연인들 그림을 보면서

너의 현실 도피적 성향에 동조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K의 친구 중 하나가 전시회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샤갈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저거야.

샤갈의 사랑은 발이 없으며, 무게 또한 없어.

언제 어디서나 사랑할 수 있고, 그것은 그 무엇에도 제약을 받지 않아.

때문에 샤갈이 만들어낸 사랑의 사전에야 말로 불가능이 없어."

 

 

흠, K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발이 달려있고, 내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그런 태도로는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거야.

넌 약한 척하며 자신감이 부족한 척하며 누군가의 보호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 누군가도 필요 없을 정도로 너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잖아.

넌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너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잖아.

그러니 네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 거야.

네가 말한 현실도피란 사랑하지 않겠다. 나의 존재만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거잖아.

넌 너 자신을 잊어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순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샤갈의 그림이

K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지성이 결여된 K.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 있지 않는 K에게

샤갈의 그림은 아직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런 K이지만,

사무치게 한 남자가 그리웠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많이 아팠을, 그래서 결국 이별을 고하기로 마음먹었을

자기 밖에 바라보지 않고 있는 K였음에도 사랑해보려고 했던 그 남자가 그리웠다.


그 남자를 지워보려고

이별의 상태가 너무 힘겨워

다른 남자라도 안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유치하고 부끄럽고 화가 나고 어쩔 줄 모르겠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한 곳은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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