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특별하지 않아. 그런 말로 스스로를 위협하고 싶지 않아.
그런 단어로 날 현혹해선 안 돼. 나에게 아주 유혹적인 단어이지만
나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기기 위한 거짓이란 걸 알고 있어.



유이는 연인이 아닌 남자 앞에서 옷을 벗은 건 처음이었고, 이 관계에서 도래할 감정, 예상하는 것보다 쓸쓸하거나, 기분 더러워지거나, 혹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걸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곧, 유이는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지 않으려고 만들어 놓은 가치관 따윈 이 관계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몸을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진짜 내가 원했던 것이 맞는 건지 그것은 또 올바른 것인지. 그에게 느끼는 쓸쓸함만큼 유이는 그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는 결코 바르게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작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호기심과 관심을 애정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그는 유이를 안은 뒤, 쉽게 유이의 손을 잡았다. 유이는 그때마다 그 손을 빼 주머니에 넣었다. 까탈스러운 여자애처럼 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몸을 섞었다고 해서 다음에 다시 자신의 몸을 만지는 일이 그에게 스스럼없는 일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 사람들에게 있어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잖아.

 

외로움이 밀려와도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뻔히 알만한 다른 여자 중 하나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오히려 더 나았을텐데. 그런 목소리로라면 차라리 받지 말지. 딱히 너랑은 전화로 할 얘기가 없다는 식의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고 그가 전화를 끊자, 유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가 쉽지 않았다.

- 관계라는 말에는 사이가 존재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뭔가 존재해야 관계도 유지된다구. 그런데 봐, 우리 둘 사이엔 뭐가 있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넌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긋고는 내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막고 있어. 내가 너에게 있어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없어. 하지만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가 특별하다고. 너야말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지. 적어도 내가 실수한 것 같다라는 기분은 들지 않게 해줬어야지.


-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행동은 외로움을 잊게 만들어 준다면 그걸로 가치가 끝날 뿐 그 행동 자체의 가치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의미를 두지마. 그 순간의 애정만 즐겨. 섹스는 친밀감을 높여주는, 혹은 친밀감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의 것이 아니야.


유이는 왜?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유이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왜? 왜? 라고 투정부리고 싶었다. 유이는 자신에게 특별하다 라는 말해놓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내버려두는 그의 태도에 진력나버렸다.

 

결국, 그를 재수없는 부류에서 정리하여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파일로 분류하고 손이 닿지 않는 책장에 꽂아 두어야 한다. 유이에게는 결단이 필요했다. 

유이는 그가 어른스럽다고 믿었다. 자신이 가진 애정을 마음껏 내비춰도 물러서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그걸 잘 조절해주고 처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미숙했다. 그에게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것이 우선 제일 마음이 아팠고, 사람에게 기대한 자신의 태도에 기대감을 줄일 줄 모르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이는 그에게 애정을 품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가 생각보다 자신을 가볍게 대한 것이 싫어졌다. 자세히 보면 비단 유이만을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가볍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유이는 생각하며 자신의 손상된 자아를 위로했다.

 

유이는 그에게 유일하지 않더라도 특별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 댓가로 쓸쓸함을 가슴에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유이를 찾아왔을 때, 유이는 감기약을 먹고 반즈음 몽롱해진 상태였다. 유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나른한 눈을 하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병문안이라고 하기엔 격정적인, 그렇게 몇 번이나 유이는 절정에 다달았다. 그의 몸에서 벗어난 뒤, 마른 타월로 온 몸에 송글하게 맺은 땀을 꾹꾹 눌러 닦아냈다.등을 돌린 채 잠이 든 그의 곁에 누웠지만 유이의 몸은 노곤함을 느끼지 않았고 감기약에 섞인 수면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정신이 말똥해진 유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쓸쓸한 등짝을 발로 밀어버렸다. 깨지않고 그대로 엎어진 채로 잠들어 있는 그를 그대로 밟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깨울 마음은 없었다.

 


유이는 CD를 하나 골라 재생시켰다. 이 밤의 배경음악 정도로, 그가 음악 소리에 깨지 않을 정도로.
아트 블래키의 앨범 Moanin' 중 3번 트랙 Are You Real
트럼펫과 색소폰의 조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어쩌면 지금의 상황과 그닥 어울리지 않을 선곡일지도 모르지만 도입부 40초를 계속 리핏해가며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일에 대해 유이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자, 미묘한 간격을 두고 일시정지된 유이와 그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전화통화를 하는 그. 유이는 그가 수신되어오는 음성을 듣고 있을 때 악질적인 장난처럼 그에게 키스를 했고, 대답을 해야할 때 즈음에는 그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유이의 그런 행동은 그를 좀 더 도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둘은 전화통화로 방해받은 시간을 보상이라도 해야하듯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다. 속이려 하는 자가 나쁘다. 하지만 그 순간 유이는 그의 비겁한 태도에 대해 질려하기 보다는 여자를 좋아하는 그래서 정기적으로 몇 명의 여자를 품에 안는 자신의 남자를, 그리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 여자애의 둔감한 직감을 경멸했다.

유이와 그 여자애는 서로 얼굴은 알고 있지만 말을 섞은 적이 없기에 엄밀히 말한다면 타인이라고 해도 좋은 관계였다. 생면부지는 아니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자신을 경멸할 빌미를 제공하게 된 그 여자아이가 가여웠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양"의 영역에 있는 여자들이 불쌍했다.
유이가 그에게 있어 "양"에서 "음"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순간
"양"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그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한다. 잡학(박학한 것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다식한 부류의 사람들은 타인의 결핍된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폭이 상대적으로 넓을 때가 있다.그 파장이 맞고, 포장이 교묘하게 눈을 가릴 때 사람들은 유혹 당한다.

유이는 타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것이야 말로 유이가 유혹자가 될 수 없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유이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고, 자신의 결핍에 대해 집요했다.

반면 그는 타인의 결핍된 부분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잘 간파했다. 결핍된 부분을 자신은 봐주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덫을 놓고 여자들이 자신을 갈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역시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유혹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내길 바라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들을 통해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충족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에게 어울렸으며 본인 스스로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달콤하게 키스를 하며 유이의 옷을 한겹씩 벗겨냈다. 나체가 된 유이를 일으켜 세워서는 벽에 밀어 붙였다. 벽에 눌린 가슴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유이의 머리채를 낚아채어 목을 젖혔다. '헉'하는 소리를 내뱉기도 전에 그는 거칠게 유이의 입술을 탐했다. 주저없이 그리고 탐욕스럽게 유이의 안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유이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그런 행동의 이유가 심연에서부터 밀려나온 충동이 아님을 유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가학적인 행동은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했다. 그는 유이에게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독창적이진 않았지만
그러나 욕심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이는 자신이 체험한 일을 미화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알고 싶었다. 추한 욕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게 만드는 매력. 그것을 탐닉해 나가기엔 겁 많은 자신. 질투라는 저열한 단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 관심. 애정.
어쩌면 허영심을 채워주는 경험.

 

그는 유이의 허영을 교묘하게 자극해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길 멈추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유이를 위로하기 위해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공감을 느낄 에너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유이가 고민하는 것 혹은 혼란스러워하는 것들에 대해 직면하는 것은 귀찮은 것이었다. 본질은 교묘히 피해나가면서, 기분 좋은 방식의 것으로 위로하는 척 하기. 그저 유이가 원하는 방식의 섹스를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유이는 스스로에게 위안이 된다는 주문 같은 걸 계속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둘다 표면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면을 부수고 뒤섞이게 만들 계면활성제 따윈 그 둘에게 필요치 않았다.유이는 멀리 떨어져있지 않고 밀착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라는 주문도 함께 외우고 있기 때문일까?

 
유이는 그의 마음을 추측할 뿐이다. 아니, 유이는 그의 마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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