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 잘 한다

-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말 기분 나빠.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문장이라고 하더라도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그리고 네가 일반의 도덕률로 날 평가하는 것도 우스워.

 

- 이런이런, 채식주의자들은 감정을 격앙시키지 않는다면서 
 

-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 동물이 도살 당하면서 느꼈을 불안, 분노.
뭐 그런 기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 사람치곤 별거 아닌 단어에 격렬히 반응하니 의외라서?

 

- 아니, 네가 일부러 날 도발 시킬 의도로 던진 말이니까, 네 뜻대로 반응해준 것 뿐이야. 재미있어?

 

- 이런 반응은 재미없는데. 한 번 더 할까? 그런 감정이 섹스로 이어지면 재미있을 것 같아.

 

- 이런 감정으로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암컷 사마귀처럼 조각조각 널 먹어야 풀릴 것 같거든.

 

- 드디어 채식 포기? 풀만 먹는 거 그만해. 내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줄게. 응?

 

 

 

 

 

유이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안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장난스러웠다. 

나쁘다라는 수식어는 참으로 섹시하게 들린다. 나쁜 남자. 하지만 늘 나쁘기만 하다면 어떤 여자가 그의 곁에 붙어있겠는가? 나쁜 남자는 달콤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유이는 이해 불능인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쓸쓸함이란 서로에게 약간의 애정과 서로에게 맞은 표현 방식만 가지고 있다면 최소화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노력하지 않았다.

 

유이는 말을 믿지 않는다. 특히 그가 하는 말들. 귀에 걸리는 달콤한 말은 언제나 유이의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들뜬 깊이의 두 배가 넘는, 아주 깊숙한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몸을 합친 사이라면 더욱더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자신을 열어보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유이에게 상처가 될 말을 정확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던졌으며, 자신을 꽁꽁 싸매고 아무 것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유이는 그를 안을 때마다 슬펐다.

 

그는 물과 같았다. 어느 새 유이 곁에 차 올라 있었고, 벗어날 수 없게 유이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발버둥칠수록 깊이 빠지는, 그 물에 유이는 자신을 내맡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온하게 물 위에 떠 있으면서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가라앉고 있었다.

 

유이는 그가 품에 안는 네 명의 여자 중에 하나였다. 유이는 노력해서 다른 여자들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수가 보이게 행동했다. 어렴풋이 그 여자들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유이와 그가 있는 세상은 협소했고, 둘은 공유하는 공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이가 채식주의자가 될 거야. 라고 말한 그 날 밤. 모두다 퇴근한 고요하고 차가운 주방에서 그는 새우나 베이컨을 대신해서 버섯과 브로컬리, 그리고 콩을 넣어 유이가 선호하는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었다. 유이는 그릇에 묻은 크림 소스를 한 방울도 남길 수 없다는 전투의지를 품은 사람마냥 긁어 먹었고, 그는 유이 입가에 묻은 크림을 핥아 먹었다. 그 둘의 첫 키스는 신선한 야채와 우유 냄새가 났다.

 

 

- 엄밀히 말하면 유제품도 먹어선 안 되는 거 잖아?

 

- 네가 날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 준 건데, 먹을 수 없어. 라고 할 순 없잖아.

 

 

 

유이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품었는지는.

그러나 유이가 그를 원했다는 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이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버렸다. 몰두하고 있음.

 

- 너 나랑 할 때, 요리 하면서 짓는 표정 짓는 거 알아?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그래서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힘들어.

 

- 네가 나가면 되겠네. 나는 여기서 수석 요리사가 될 때까지 버틸 거야.

 

- 날 내보내고 싶은 거야?

 

- 상관없어. 네가 있든 없든. 넌 내 경쟁자는 아니니까.

 

- 윽, 상처 주는 말인데.

 

- 그 정도로 상처 따윈 받지 않은 거 알아. 진짜 상처가 되었다면 상처 받았단 말도 안 할 거잖아. 넌.  

 

 

 





유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등 뒤로 한 채, 벗어놓은 속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는 다리를 쭈욱 뻗어 엄지발가락으로 유이의 등뼈를 쓸어내렸다. 유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내가 쓸쓸해지는 일 따윈 그만 할래. 이제 오지마.

 

그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유이의 말을 농담처럼 여겼다.

 

- 넌 실력도 있고 스카웃 제의도 많이 받으니까, 아예 다른 레스토랑으로 가 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 편하자고 그런 걸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까, 지금 일어나서 나가주면 좋겠어.

 

그는 이내 먹던 과자를 뺏긴 아이처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소용없어. 이제 안 통해. 그런 표정.


- 제법 잔인한 구석이 있다

 

- 그렇게 만든 건 너야. 우리 관계를 항상 먼저 포기한 건 너였어.

그 뒤에 힘겹게 추스리고, 눈물을 닦고, 쓸쓸함을 이겨내고

이런 모든 과정을 나는 너와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 해냈던 거라구.

   

- 당신, 쎄구나.

 

- 내 말투 따라 하지마. 특히 그 당신이라는 말. 하지마.

너한테 그건 오직 너 하나를 가리키는 2인칭이 아니라 당신이 웃어준 다수 여자들을 향해,

모두들 그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게 만드는 주문 같은 거잖아.

난 그런 뜻으로 그 단어 쓴 적 없어. 그러니까 어설프게 따라 하지마.

 

- 왜 그래? 너답지 않게?

 

- 내가 누군데? 넌 내 이름을 불러준 적도 없어. 넌 나다운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넌 나를 통해,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너의 필요를 충족시킨 것 뿐이지, 나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순간은 없었어.

 

-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더 많이 예뻐 해 줄게.

 

- 이제 필요 없어, 그런 거. 너도 내가 하는 말 하나도 신경 안 써도 돼. 나 역시 네가 나를 피곤한 여자라 생각하든 말든 전혀 관심 없으니까.

 

유이의 목소리엔 흥분도,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수도 없이 연습해서 기계처럼 딱 맞아 떨어져 버리는, 그런 건조한 말들의 연속이었다.

 

- 어차피 너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내 이름이 그렇잖아.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유이하지. 네가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면, 겁 내지말고, 몸 사리지 말고 네가 먼저 사람을 마음으로 좋아해 봐.
상대의 마음을 홀리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좋아해주라고. 계산적이잖아. 상처받을 마지노선이 조금이라도 보이려 하면 도망가고, 어쩔 때보면 넌 흑심만 있는 연필 같아. 말만 잘하지 궁극적으로는 하룻밤 품에 안고 잘 따뜻한 여자를 구하는 거 뿐이잖아.
너 매력있어. 상당하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넌 알면 알수록 건조해서 부서져 버릴 것 같아. 혹은 타인의 감정이나 슬픔 따위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동조도 할 수 없는 사이코 패스이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어. 네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바로 그런 유형일 거야.

 

유이는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 베풀어 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감정적으로 궁핍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몸보다 마음을 먼저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자기 곁에 오래 두지 못하고 금세 싫증을 내거나, 지친 여자가 먼저 떠나간다는 것을.

 

네 명의 여자. 그 중에 유이는 마라톤을 하듯 가장 오래 버텼지만.

그 길에서 유이는 자기가 완주해야 할 코스는 이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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