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책이 없다. 출근길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울어버리다니, 그러나 내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니 새삼 지금에 와서 부끄러울 건 없다. 그러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내 모습을 비추고 있던 지하철 문이 열렸고 하필 논현역에서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도영 씨가 지하철을 탔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나는 문 가운데 서 있었고, 도영 씨는 지하철을 타려다 울고 있는 나를 목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넋 나간 것처럼 헤- 웃으며 여기서 타는 군요! 라고 말했다. 도영 씨는 내 뒤에 서서 네. 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행이야. 옆에 서지 않아서. 고개를 힘겹게 뒤로 돌려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지. 뒤에서 느껴지는 도영 씨의 가늘고 긴 몸에서는 여름의 풀잎 냄새가 나는 듯 했다.

혹시 도영 씨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을 걸지도 모르니까 왼쪽 귀의 이어폰을 뺐다.
'너가 좋아했던 살구빛 샐러드 그날은 샐러드 기념일'
순간 그런 닭살스러운 노래가 새어나와 지하철 안에 얕게 퍼졌다.


 

이건 에쿠니가오리 탓이다.
<호텔 선인장> 때도, <홀리 가든> 때도,
<반짝반짝 빛나는 때>는 아예 엉엉 소리내며 울어버렸다.

나는 신지에게 녹신녹신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람피우는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됐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인간은 바람을 피우지 않곤 살 수 없는 생물이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전심전력으로 녹신녹신해진 채 태연히 살아갈 순 없다.


라는 문장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이 여자 뭐야. 무장해제의 상태인 나에게 미끄렁거리며 다가와서는 찌릿하고 감전시켜버린다. 전기가오리 같은 여자.

 

 


 
직장에서 가까운 집을 내팽개치고는 무작정 희우의 집으로 들어왔다. 희우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희우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집과 재산, 그리고 어마어마한 보험금까지 받았다. 3인 가족이 살기에도 커다란 아파트. 희우는 나에게 우리가 함께 잠들 침실을 보여주었다. 서재로 쓰고있는 깔끔하고 아담한 방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 옷을 수납할 수 있는 빈 옷장과 잇몸 건강에 특히 도움을 줄 것 같이 생긴 칫솔을 내주었다.



밝아오고 있다는 걸 몸이 먼저 느낀다. 아침이 오는 것이다. 몇 분 혹은 몇 십 분 후에는 알람이 미친듯이 울리겠지. 나는 희우의 등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킨다. 희우는 잠결에 돌아누워 나를 꼬옥 안아준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희우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넣는다. 따뜻하다. 36.7도의 따뜻함이었다. 사람의 정상체온 36.7도 정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희우를 만나고 나서부터 내 몸의 온도는 서서히 상승해서 튀김을 튀겨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희우의 체온은 36.7도 정상인듯 했다.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희우와 떨어지기 싫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나는 성실한 회사원 모드로 출근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알람이 울리는 유예 시간이 올 때까지 희우를 꼭 붙들고 있는다. 희우는 그런 맘도 모르고 잠에 취해 건성으로 나를 안고 있다. 토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커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프로젝트를 하나 더 맡았다. 
바빠지기 위해, 정신을 혹사시키기 위해 일을 늘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머리 속은 온통 희우 생각으로 가득 찬다. 뭘 하고 있을까? 점심은 뭘 먹었을까? 누굴 만나고 있을까?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규격화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나에 반해서 뭘해도 상관없는, 굳이 뭘 해야할 필요도 없는 희우의 삶은 나에게는 물음표 투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의 하루로 인해 나는 미칠 것 같은 불안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를 때 즈음
희우는 일어나서 얇은 이불을 둘둘 말아 바닥에 끌며 화장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뒤에서 안아준다. 나는 몸을 살짝 돌려 팔로 희우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그의 배에 귀를 가져다댄다. 이렇게 희우의 몸에 매달려있으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그의 내장이 내는 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아 안타까워진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몸을 떼어내니 희우가 말한다.

"꼭 출근해야 해? 어제도 회의한다고 늦게 들어왔잖아."
직장생활을 해 본 적 없는 희우는 저런 말을 잘도 내뱉는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지만, 희우가 책임감없는 남자가 될까봐 겁을 먹는다.난 말야, 잘하는 남자도 좋지만 맡은 바 일에 충실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가 좋아.
"내 얘기하는 거야?"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희우의 말에 불안한 내 마음이 묘하게 진정되었다. 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그의 견갑골에 입을 맞춘다. 진분홍색 입술 자국이 남은 그의 하얀 속살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아림은 이번에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부연 설명 따윈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꿰뚫어본 것처럼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푹 빠져 있으니까 말야."

 



산 미구엘을 비우고 레페 브라운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재윤은 자신이 피우던 쿠바산 시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한 번 해봐요."
맥주의 기운 때문인지 선뜻 그걸 받아들고는 가볍게 빨아들였다. 시가의 향이 나쁘지 않았다.

퇴근을 하면 6시. 일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희우 품에 안기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한다.
밀리는 버스도 싫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녹초가 되는 것도 싫다. 순간이동을 해서 곧장 희우 곁으로 가고 싶어진다. 희우의 냄새를 킁킁킁하고 맡고 싶어졌다. 이런 내가 모자르고 바보같아서 배회하다 들어간 곳이 재윤이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재즈바였다. 몇 시간을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호가든을 마셨고, 아사히도 비웠다. 취하진 않았다. 재윤은 Inger Marie의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바를 사이에 두고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너무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쓸쓸해지고 자신없어지는 이 아이러니를 견딜 수 없다. 나는 조금씩 몸을 뒤로 뺀다. 재윤은 조급히 그만큼 몸을 밀어붙인다. 재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 블라우스 셔츠의 단추를 푼다. 내 몸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 재윤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나를 연출할 수도 있고, 타고난 재능대로 그를 놀려줄 수도 있다. 희우 앞에서는 무능한 상태로 녹아내려버리고 마는 내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존재를, 나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재윤과 잤다. 아니 섹스를 했다.

 


아림은 자다라는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대신 행위만을 의미하는 <섹스>로 교정해주었다.
"뭐 어때. 좋았으면 된거 잖아."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꽤 거칠 것 같았던 재윤은 의외로 섬세하게 나의 반응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가학적으로 나를 탐했다면 그 순간 멍청한 나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윤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희우와 나는 천생연분이었다. 처음 해 본 연애였지만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나한테만 딱 맞는 것이었다. 희우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격정적이지 않았고, 일상적이며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독하게 고독해지는 까닭은 희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아무 것도, 아무 의미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희우가 재윤에 대해서 안다면, 도영 씨에 대해서 안다면, 일본에 출장가서 만난 타쿠미씨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슬퍼질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photographed by Patrick Demarchel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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