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은 바닥에 가득한 풍선들을 발로 툭툭 차며 들어왔다.
"
뭐야, 이것들은
?"

너한테는 말해줄 수 없는 것! 혼자 속으로 외치곤 희정이 건네준 기름기가 베어 나온 튀김봉투를 갈랐다. 희정은 답이 없자,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며 입을 삐죽거렸다.

 

료와 먹을 땐 고소하고 바삭한 맛있는 튀김이었는데 말야.
"
그런 소리 내뱉을 거면 왜 사람을 생고생시킨 거야
?
상수역에서 너네 집까지 튀김 냄새가 진동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사왔더니. 먹지마
!"
포장해서 들고 오는 동안 식고 눅눅해졌기 때문에 맛의 차이가 나는 게 아니었다
.



나도 알고 있었다. 희정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
희정은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열이 받아서는 료와 나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료와는 4년째 연애 중. 앞으로도 별 일이 없는 이상 그와 연애를 지속할 것이다.
둘이 함께 살 계획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이라는 성취단계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불투명하다
.
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료나 내가 하는 일이 바쁠 땐 만나지 못하는 시간의 터울이 길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희정이 정의하는 연애에서 보자면 무심하기 짝이 없어서
희정은 료만 떠올리면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진다.


"지금과 같은 상태, 잘도 견딘다
."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방식으로 나를 내버려두는 ''를 사랑하는 내가 못마땅한 것이다.

 

료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부드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엄살부리는 것을 받아주고 토닥거려 줄 정도로 너그럽지는 않다
.
료는 서로가 시간을 많이 공유한다거나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싫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자기 몫의 외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게 하지 않으려면 그걸 즐기라고 했다.

 

"그 정도로도 만족이 되는 거야?"
우리는 떨어져있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깊고 묵직한 사랑을 나눈다.

 

료는 수컷 늑대 같은 면이 있다.
출신 직전의 암컷에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정하게 군다
.
새끼들이 어미 몸 밖으로 밀려나오고 하나,둘 굴 밖을 무사히 걸어 나오게 되면 그런 행동도 끝이다
.
암컷이 임신하고 있을 때는 먹을 것도 가져다 주던 수컷은

암컷이 몸을 풀고 나온 뒤, 사냥한 먹잇감에 먼저 입을 대려고 하면
혹독하게 암컷을 위협하고 서열을 재확인시켜준다. 둘은 독립체가 되는 것이다
.
다행히 료와 나는 서로 동등한 서열이다.

 

"내가 보기엔 네 긍정 에너지가 과도한 것 같아."

 

하지만 항상 먼저 료가 달려드는 걸
어쩔 땐 료를 위해 일주일 전부터 고르고 골랐던 속옷을 보여줄 여유도 없이
나에게 달려들어 우리 사이에 거추장스러운 그런 것들을 후다닥 처리해버리고는
하루 종일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도 있어.
배가 고파서 탈진할 정도가 되면
료는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서 침대로 가져온다구.
그러고 나면 료는 내게 양치질할 시간만 줘.

 

희정은 그걸 의무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에게 안기면 의무감은 느낄 수 없다.
의무감만으로 날 안는다면 예민한 나의 몸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에게 안겨있으며 끝없이 긍정할 수 있는 기운을 받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니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들해지지 않고 잘 지내는 거야.
우리가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게 될 수 없어. 특별하지.
료와 함께 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오감을 집중하게 돼.

 

료와 48번을 만나면서 수치적 데이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겠지만
각각의 데이트에서 느낀 감정은 생생하게 몸에 기록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불러일으킬 수 있어.

 

그렇게 말해도 희정은 료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료 앞에서는 곧잘 강해진다.
그러나 료가 만나고 난 뒤, 혼자있게 되면 꼭 며칠동안은 안절부절 못하고 감정기복이 심해진다.
내가 그렇게 되는 걸 희정은 알고 있다.
희정은 애정결핍 상태가 되어버린 내가 보기 싫은 거였다.
그러나 나는 ''를 사랑했다.
며칠이 지나면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료를 기다리는 행복을 누린다.

 

"그런게 사랑이야? 내가 보기엔 가끔식 욕구를 채우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인, 허울좋은 구실인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료가 곁에 없는 나는 약해빠졌으니까.
하지만 나의 불행을 자초할 순 없어.
료와 헤어지지 않는 이상, 선택권 따윈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료의 애정을 믿는 것 밖에.

 

희정의 긴 잔소리 끝은 명함 한 장이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료를 넋 놓고 기다리지만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보라고 했다.
료만 만나니까
세상에 그런 나쁜 놈에게 동화되어
더 근사하고 나에게 집중할 남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거라고 했다.

 

희정이 돌아가고 혼자 방에 남은 나는
적당히, 알맞게 공기가 빠진 풍선을 골랐다.
그리고 풍선 주둥이 쪽에 가위로 살짝 구멍을 냈다.
풍선에서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붙자 풍선은 팽그르르 돌며 자기 안의 공기를 내뱉었다.

 

료의 숨결

.
료의 이산화탄소

 

 

료가 잔뜩 불어놓고 간 풍선에 구멍을 바람을 빼내며
나는 료가 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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