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S랑 잘 거야."

K의 이런 발언에 놀랄 친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K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은 까닭은

그 대단한 결심을 선포한 곳이 거리낌 없이 Girl Talk를 나눌 수 있도록 공간 분리가 잘 되어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보다 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전시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은 미술관이라서 당연히 K의 무리에게 불편한 시선이 모였다.

이런 K의 단순한 성격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좀 작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미술관 옆 카페테리아로 K를 끌고 나온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우정은 무관심한 일에도 적절한 관심과 코멘트를 필요로 한다.

"S? 그 S? 애저녁에 헤어졌잖아?"

"그 새끼를 다시 만나겠다고?"

"다시 만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 거라고."

 

K와 S는 이미 3년 전에 헤어진 사이였다.

헤어졌다는 말보단 K가 일방적으로 차였다고 하는 게 옳은,

한 줄로 그 관계를 요약하자면 “K보다 나이도 어린 S가 순진한 K를 데리고 놀다 버린 것이었다.”

 

뭐, 여기서 순진함이란 마음이 꾸밈없고 참된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도 그 의심을 억지로 지우고 자신이 세워놓은 사랑의 정의를 믿는 순진함이었다.

S와 관계에서 처참히 박살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신되지 않는 전화를 걸고,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불면의 밤을 수없이 보내고,

자신의 괴로움을 반복적으로 토로하면서 친구들을 괴롭혔지만 친구들은 그런 K를 미워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각박한 세상에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죄악이라며, 자신의 눈을 핑크빛 하트로 만든 남자를 찾았다고 했다.

 

 

 

 

 

"너, S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사랑이 아니란 걸 알아. 사랑하지도 않아. S도 날 사랑하지 않아. 우린 솔직하지 못했어.

서로 원하는 건, 몸뿐이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난 무서웠거든. 그런 선택을 한다면 사랑을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속여서라도 S를 사랑한다고 말해야했었어.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나에게 최면을 걸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도 돼.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싶어. 사랑은 그렇게 얻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것이라도

욕망하는 것을 손아귀에 쥐고 싶어."

 

 

 

"어떻게 다시 만나려고?"

 

인생은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걸 L,M,N의 남자들을 만나 오면서 깨치고도 도가 텄을 K임에도

머릿속으로 짜놓은 시나리오들을 줄줄이 읊어낸다.

K의 구성은 그동안 읽어왔을 삼류연애소설의 변형 판이었지만,

그 순간 K는 절실해보였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별 후에는 자학 증상이 나타나긴 한다지만 이건 좀 수위가 높아. 감정적으로 더 망가지려고 작정을 한 거야?"

 


"나도 자신 없어. 다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순 없어.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그 사랑이, 내게 치명상을 입힐 준비를 하고 벼르고 있는 세상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잖아.

난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던 대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현실감 있게 원한 적이 없어.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지도 않았어. 내게 입 맞춰 주는 입술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남자들의 페니스도 똑바로 본 적 없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게 되면, 구두 뒤 굽을 두 번 톡톡 치면

캔자스 외딴 시골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도로시가 되어버릴 것 같단 말야.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 10cm는 붕 떠있는 그런 관계

아직 정해진 게 하나 없는 불안한 어린 영혼인 나에게 사랑은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환각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어.

내게 사랑은 엑스터시나 LSD같은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 사랑이 나에게 치명타를 날렸어.


너희들도 알잖아.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순간, 그 순간들이 날 어떻게 배신했는지.

그 사람이 내게 원한 것은 현실이겠지만 난 그렇게 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쳐갔겠지.

 

알아. 내가 잘못한 걸 알아.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현실이 힘겨웠다고

그래 지금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지금의 내 상태도 현실에서 더욱 더 도망치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아.

난 이 세상에 당당하게 발을 붙이고 서 있기엔 나약하고 존재감마저도 미약하니까.

그나마 S를 원하는 건, S의 그것을 내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이잖아."

 


자기변명 밖에 지나지 않는 말들을 내뱉는 K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친구란 이름으로 K의 계획을 들어주며 동조해주거나

그 계획이 무산되거나 트러블이 생겼을 때 술 한 잔 기울여주면 그만이다.

 

이러니저러니 하며 K를 걱정해주는 것도 k의 귓가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동의만을 바라는 K에게 뭔가 충고를 하면

K는 자기 합리화의 대사를 읊어낼 것이며, 그걸 들어주는 것이 더욱 귀찮은 일이었다.

 

그때였다.

 

"사랑은 진정,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패가 될 수 없는 거니?

그럼 너는 이제 사랑을 믿지 않는 거지? 더 이상 사랑이니 뭐니 그런 말에 기대하지 않을 거지?"

예상치 못한 반문을 받은 K는 당황했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을 믿는 게 두려워.

적당히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래."

 

 

"넌 여기 와서 붕 떠있는 연인들 그림을 보면서

너의 현실 도피적 성향에 동조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K의 친구 중 하나가 전시회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샤갈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저거야.

샤갈의 사랑은 발이 없으며, 무게 또한 없어.

언제 어디서나 사랑할 수 있고, 그것은 그 무엇에도 제약을 받지 않아.

때문에 샤갈이 만들어낸 사랑의 사전에야 말로 불가능이 없어."

 

 

흠, K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발이 달려있고, 내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그런 태도로는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거야.

넌 약한 척하며 자신감이 부족한 척하며 누군가의 보호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 누군가도 필요 없을 정도로 너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잖아.

넌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너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잖아.

그러니 네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 거야.

네가 말한 현실도피란 사랑하지 않겠다. 나의 존재만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거잖아.

넌 너 자신을 잊어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순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샤갈의 그림이

K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지성이 결여된 K.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 있지 않는 K에게

샤갈의 그림은 아직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런 K이지만,

사무치게 한 남자가 그리웠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많이 아팠을, 그래서 결국 이별을 고하기로 마음먹었을

자기 밖에 바라보지 않고 있는 K였음에도 사랑해보려고 했던 그 남자가 그리웠다.


그 남자를 지워보려고

이별의 상태가 너무 힘겨워

다른 남자라도 안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유치하고 부끄럽고 화가 나고 어쩔 줄 모르겠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한 곳은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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