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인간에게 그런 태도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순간에도 둘 사이의 장애를 가정하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그것을 대비하려고 마음을 정비하기 바빴다.

사람에게 빠질 때마다 소녀스러운 감정이 솟아나곤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걸 상대에게 전달하진 않았다. 

왜 좋아한다고 표현하지 못하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말을 내뱉느니 혀를 자르거나 목을 긋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말랑한 말들을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전하고 

그를 생각하면 벅차오르는 심정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어떤 때보다 시작부터 장애요소가 많은 관계였는데 그런 것 따위 하나도 문제되지 않았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많이 가는 것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마음의 성급함도 내겐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근거없이 그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렇게 감정을 쏟은 건 아니었다.
대상을 이상화해서 바라봤기에 좋아진 그런 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내게 응답가능한 능력을 갖춘 사람임을 그는 보여주었다.
나는 그 지점을 예뻐했다.

그에게 나와의 시간이 일종의 역할극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해진다.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그 시간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를 농락한 악한 사람이고 나는 실패했다. 그리고 죄책감을 가진다. 
내가 고른 것이 가장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자책한다. 
나의 잘못이다.



자책하기 싫어서 상한 걸 손에 쥐고 어리석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기본위대로 나를 휘두르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간은 과거에 박혀있고 

그것이 재현될 의지가 없고 어떤 언어도 상대에게 전하고 싶어지지 않은 상태라면
그건 이미 가망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버린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망설였거나 실망했거나 두려웠거나 외로웠거나
어떤 선택지를 택해도 상관없었다.

동시에 그를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모순은 바로 그 지점이다.
나와 그는 서로의 깊은 지점까지 읽어들어간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낯선 사람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서로에게 증명한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선함을 읽었다.
나는 그를 내멋대로 나쁘다고 규정지을 수가 없다.

그 둘을 다 가진 사람. 내겐 너무 좋고 나쁜 사람. 
그래서 여느 때처럼 돌아서면 냉정하게 더이상 어떤 말도 덧붙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와 직접적으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를 읽을 수 있는 다른 매체들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이제 그곳에서 읽는 그는 그저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대신 그에 대해서 쓴다.
그에 대해 충분히 내 안에서 토해내고 정리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내 문장의 주인은 그일 수밖에 없다. 



그가 곁에 있을 때도 나는 쓸 수 있는 인간이었고
그가 부재하는 이 순간에도 쓰게 만든다.

그게 그가 가진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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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속절없는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분이 울적해져서 원초적으로,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위로받고 싶을 뿐 다른 이유가 없는 슬픔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앨리스 역시 이런 약한 면모로 그 남자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그 남자는 그녀가 강할 때 스스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그는 나보다 한참 어렸다. 그럼에도 팔베개를 해주고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내게 아기 같다고 말했다. 
또래 아니 동생 같이 여겨진다며 내 속의 어린 아이를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살아온 시간의 물리적인 축적. 그것이 사람을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기에
여러 측면에서 그는 어른스러웠고 믿음직스러웠으며 쉬이 변하지 않을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의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내가 어른이었기에 나를 좋아한 것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소망은 여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여지를 찾는 것이었다.
내가 겁을 먹어도, 고민이 있어도, 신경이 날카로워도 날 사랑해줘요. 내가 잘하지 못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해줘요.
-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내 안의 어린이는 상대방의 애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무한한 사랑.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바라고 있었다.

잘 막아둔 마음에 균열을 일어 그 틈새로 보인 나의 어린이에 
누군가 놀라 뒷걸음질 치는 모습에 상처를 받았다면 같은 실수는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말랑해진 마음은 조금만 기댈 구석이 생겨도 우르르 무너져버린다.
그게 연애의 단점이다.
흔들려버리고 마는 것. 휩쓸리게 되는 것.
혼자 일 때 평온한 마음은 누군가 던진 돌에 파장이 이는 호수처럼 출렁거리는 것이다.
결국 그런 심정들로 인해 연애를 망치는 것이 된다.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는 실수.
 
어린이들은 사랑받고 싶어한다.
게걸스럽고도 탐욕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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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야구는 5시간을 넘겼다. 올해 처음 보는 야구 중계였다. 동점 상황에서도 6회 말부터는 조금씩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는 아무래도 집중해서 보기는 힘든 스포츠. 너무 애달프게 하는 것도 심장에 좋지 않은 느낌.
될듯 될듯 안 되는 삼성에게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되어버렸다.

적당한 설명을 영리하게 이해한다고 칭찬도 들었고 축구보다 수를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어 감독이나 선수 욕을 확실히 할 수 있다는 그런 점에서는 흥미로웠지만 챙겨보게 될 스포츠는 아니라는 게 좀더 확실해졌다. 덧붙여 섹스를 하면서 볼 만한 스포츠는 아니라는 것도, 섹스와 잘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축구! 그 생각도 좀 더 견고해졌다. 







금요일 밤, 야구를 볼 생각은 없었다. 그날은 감기가 지독하게 걸려 밤새 아팠다가 병원에 다녀와 골골골거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약을 먹고 한 시간 정도 푹 잔 덕분에 열은 좀 내렸고 콧물이 흘러내리던 증상도 완화되었다. 혼자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혼자서 병치레를 하는 건 그리 힘들고 서글픈 일도 아니었다. 다만 감기엔 약보다 섹스가 더 좋은 치유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No라고 대답했을 제안에 그래. 좋아. 야구 보자라고 답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것이나 내가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없었다. 야구를 같이 보고 싶다라는 제안이 일상적인 것을 나와 함께 하고 싶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야구를 보면서 섹스를 하고 싶다라는 다른 판타지의 충족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섹스가 끝난 뒤 모로누워 뒹굴거리며 시덥잖은 농담 같은 걸 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우스갯소리 혹은 빈정거리는 말을 주고 받았다. 삼성이 몇 번이나 기회를 놓치면서 욱하고 짜증나는 마음에 한 번 더 했을 뿐이었다. 

다섯 시간 정도 같이 있으니 그를 빨리 보내고 싶었다. 혼자서 쉬고 싶었다. 내가 뭐 해줄까? 라고 묻는 그에게 집에 가 라고 답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상처받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서로의 방식에 길들여질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었다. 그가 가고 나서 삼성의 실점이 마구마구 이어졌다. 다른 팀에 비해 삼성을 응원하니 별로 한이 없겠다라고 물었을 때 지금이야 그렇지만 간절히 우승하길 원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삼성은 실망감만 안겨주었다고 말하며 옷을 챙겨입고 나간 그에게 실점 스코어를 문자로 내주었다. 갑자기 얄미운 짓만 골라서 했다. 유치할 정도로 못된 짓을 마구 했다. 아마도 이게 나의 되먹지 못한 본성. 그에게는 사악하고 짓궂은 내가 폭발하고 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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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조금 많을 뿐





티셔츠를 걷어 올렸을 때 셔츠 안에 새겨져 있는 문구.

텀블벅에서 음란소년 앨범 후원하고 받은 티셔츠.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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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근황이라고 제목을 붙이니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지만

야후! 코리아 철수 이후로 새로운 칼럼을 업데이트 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새 글 업데이트가 없어서

이거이거 너무 조용한 거 아냐? 하실까봐

근황을 포스팅하자면,

준비 중인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곧,

곧,

 

돌아올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리고, 저 요즘

음란소년에 푹 빠져있어요.

- 제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 콜라보레이션 북콘서트하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좀 더 열심히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해야겠죠.. 2013년도 즐거운 밤을 만들어 보아요.

 

- 오빠보다는 누나는 담백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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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으며 당신을 떠올렸다. 나는 0.5도 데워진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시와 당신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오글거리지만 이 시간의 사실이므로 내버려둔다. 불특정다수에게 이인칭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허세롭고 몹쓸 단어지만. 지금은 꽤나 쓸모있다.


물론 몇 년만의 시집인지 모르겠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지. 시를 읽는 법도 모른채 더듬더듬 만져내려간다. 당신 때문 아니 덕분이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그래서 처음인 양 두렵고도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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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마른 날이었다. 코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청량했고, 비 냄새는 결코 나지 않을 그런 맑은 날이었다. 그믐의 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늘어져 가는 위태로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2. 삼투압 현상이었다. 그건. 

 
3. 안녕

 
4, 너는 항상 비가 오는 날이면 내가 창문을 열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기장판으로 바닥을 따뜻하게 데운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뒹굴거리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바닥에 닿는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나의 작은 반지하 방. 우린 그 곳에서 수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별에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를 이야기하지만 너는 이제 아무런 실체가 없다. 너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나를 안도해하고, 이런 나를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동시에 너는 자책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항상 나를 위해 울었다. 너를 위해 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차가웠고, 사랑이라고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너의 애정에 보답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내게 보여준 너의 사랑에 만족할 줄 몰랐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게 널 아프게 만들었고 내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나의 사악함이 너를 망쳐버렸다. 아름다운 너를


5. 나는 내면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만 향해 있던 시간을 10년이나 보냈다. 그 버릇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런 내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 고마워서 고맙고 고마워서 미안하다. 당신들이 각자 힘든 시간들을 버텨가고 있다는 걸 모른 척하고 나만, 나만 아프고 힘들다고 말해서 미안하다. 내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해도 한결같이 반응해주고, 그것이 내가 아닌 나를 둘러싼 환경이 만들어 낸 나라고 이해해줘서 정말 고맙다. 
 

6. 잘 자라는 말. 고마워요. 


7. 내게 나타나줘서 고마워요.

 
8. 내게 수줍은 척 하는 게 아닌 부끄러움을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9. 당신을 생각할 수 있어서 고마워요. 

 
10.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11. 솔직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장난스러운 듯 하지만 가볍지 않게, 천천히. 오래된 물건을 정리해서 버리는 일보다 오래된 나쁜 습관을 버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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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화장대 위에 몇 개월 전에 내가 선물해드린 화장품을 발견했다.
거의 쓴 흔적이 없다 싶을 정도로 줄어든 양이 적었다.

고모님 말씀이 "손녀 딸이 주신거니 아껴아껴 바르겠다"고 하시며 
화장품을 볼 때마다 기뻐하셨다고 했다.

나는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 기초화장품이었다.
처음 할머니께 선물한 스킨 로션을 다 써보시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껜 항상 잘 못 했다.
모든 걸 받아주시니까 어리광부리기 바빴다.

 

동생과 아버지, 할아버지와의 관계.
우리 집 남자들과 좋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중재하고 내 마음을 달려주신 건 할머니뿐이었다.

 

늦게 일어난 일요일 오후.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다.

 

 

 

지난 주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 때문에
마음이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고
갖가지 감정들이 올라오는 걸 억누르고 있었더니
평소에 잘 참았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휘감았던 것 같다.

 

결국 타인을 통해 해소할 수 없는 본래의 나약함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차분하게 홀로 있고 싶었던 밤
마음의 평화를 내 스스로 깨어버렸다. 

나답지 않게 행동한 자신에 대해서도
나를 그대로 받아주고 보듬어주셨던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나를 아끼고, 좀 더 소중하게 행동해야하는 것이라고 반성했다.

결국엔 이러니저러니해도 생채기를 하나 더 늘이는 일일 뿐이니까.

 

부디 나의 기질에 맞게,
그리고 순간의 친절함에 흔들리지 않게
굳건한 마음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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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유리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나온다.
유리는 남자를 만날 때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낡은 면 팬티를 입는다.
그렇게 끝까지 갈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젖어드는 자신의 욕망을 간신히 절제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섹스를 유예시킨다.
(그런 노력은 아이러닉한 상황 속에서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몸 달아하는 남자를 적정선까진 붙잡아 놓기 위해 섹스 대신 오럴을 하는 건
내 기준에서 '그거 뒤에 섹스 붙잖아. 결국 그것도 섹스야.'라고 말해주고 싶은 일이다. )

 

아무에게도 자신을 내맡긴 적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몸은 예민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발랄함과 생기를 지낸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무모하게 용기가 있고,
자기보다 다섯, 여섯 많은 여자들을 할머니 취급한다. 일곱즈음 많은 여자들은 죽어버린 채 살아있는 좀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 결코 비굴하게 연명하지 않을거야.'
그래서 그 중에 좀 더 영특하고 발칙한 여자 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과 거래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좋은 조건을 갖춘 남자의 품에 풍덩함으로써,
세상살이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몸에 새겨야 하는 생채기를 피해가는 것이다.

 

여자를 안는 즐거움을 아는,
어느 정도 세상살이를 겪으며 자신의 좌표를 냉정하게 찾아내고, 경제적으로도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서른 언저리의 남자들은
스무 살 여자아이만큼이나 매력적이다.
덧붙여, 순수함을 조금 손상당한 대신 야망이라고 부르기엔 소박한,
평생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꿈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남자들에게서 즐거움을 취하다
괜실히 유치해져서
"넌 어떤 여자랑 결혼할 건데?"라고 물으면 답은 비슷하다.
"우선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한, 게다가 집에 돈이 많으면 좋겠지."
입만 열었다하면 달콤함에 취해 녹아버릴 것 같은 말을 내뱉는 그들이지만
그 질문에서만큼은 "너 같은 여자."라는 위험한 발언은 삼간다. 역시 나이 헛 먹은 게 아니다.

 

 

 

그래서 발칙한 스무 살 여자와 영악한 서른 살 남자는 잘 어울린다.
서로 추구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해 좀 쓴 맛을 봤기 때문에
영특하게 둘은 엉킬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스무 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다시 스무 살이 된다한들
머리로 계산기 두드려가면서 남자의 조건을 비교분석할만큼
두정엽 부분에 주름이 쪼글쪼글 잡혀있지 않기에,
나는 나의 처녀성을 빌미로 안착할 수 있는 남자를 고르지 못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내 안에 타인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넘쳐날 때, 한 번이라도 더 사랑에 매진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점점 더 영악해져가는 주변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나는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아,
그렇다고 헌신을 다해 소년들을 키우기엔 어중간해져 버린,

이제 나에게도
어린 남자와 영악한 어른의 문턱을 넘고 있는 남자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잘 잡아야하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온 것이다.
내 나이 즈음의 여자들이 갖춰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뻔하고 말로 하기 쉬운
서점에 가면 널린 처세술 서적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자기 긍정>이다.
나는 내가 좋아. 나는 매력있어.
긍정할 구석도 가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마인드 컨트롤이나 하고 있으란 얘기는 아니다. (그딴 건 망상이 되기 십상이다)불안에 떠느니, 자신의 외면이나 내면에 영양분이 될 것들을 찾아 마구 흡수하고
지금의 어중간함을 진정한 자기 발전의 적절한 동기로 삼아 자신에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내 '서른'이라는
나이의 타이틀이 너무 오래된 것 같고
내 눈가의 주름이 너무 깊은 것 같고
내 사랑의 열정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는

내 안의 스무 살 여자아이보다 순수하고,
주름의 깊이만큼 사려깊고,
오랜 숙성을 거친만큼 좋은 사랑- 을 가진 서른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라면
내 쪽에서 이미 No, No, No 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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