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유리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나온다.
유리는 남자를 만날 때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낡은 면 팬티를 입는다.
그렇게 끝까지 갈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젖어드는 자신의 욕망을 간신히 절제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섹스를 유예시킨다.
(그런 노력은 아이러닉한 상황 속에서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몸 달아하는 남자를 적정선까진 붙잡아 놓기 위해 섹스 대신 오럴을 하는 건
내 기준에서 '그거 뒤에 섹스 붙잖아. 결국 그것도 섹스야.'라고 말해주고 싶은 일이다. )

 

아무에게도 자신을 내맡긴 적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몸은 예민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발랄함과 생기를 지낸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무모하게 용기가 있고,
자기보다 다섯, 여섯 많은 여자들을 할머니 취급한다. 일곱즈음 많은 여자들은 죽어버린 채 살아있는 좀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거야. 결코 비굴하게 연명하지 않을거야.'
그래서 그 중에 좀 더 영특하고 발칙한 여자 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과 거래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좋은 조건을 갖춘 남자의 품에 풍덩함으로써,
세상살이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몸에 새겨야 하는 생채기를 피해가는 것이다.

 

여자를 안는 즐거움을 아는,
어느 정도 세상살이를 겪으며 자신의 좌표를 냉정하게 찾아내고, 경제적으로도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서른 언저리의 남자들은
스무 살 여자아이만큼이나 매력적이다.
덧붙여, 순수함을 조금 손상당한 대신 야망이라고 부르기엔 소박한,
평생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꿈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남자들에게서 즐거움을 취하다
괜실히 유치해져서
"넌 어떤 여자랑 결혼할 건데?"라고 물으면 답은 비슷하다.
"우선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한, 게다가 집에 돈이 많으면 좋겠지."
입만 열었다하면 달콤함에 취해 녹아버릴 것 같은 말을 내뱉는 그들이지만
그 질문에서만큼은 "너 같은 여자."라는 위험한 발언은 삼간다. 역시 나이 헛 먹은 게 아니다.

 

 

 

그래서 발칙한 스무 살 여자와 영악한 서른 살 남자는 잘 어울린다.
서로 추구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해 좀 쓴 맛을 봤기 때문에
영특하게 둘은 엉킬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스무 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다시 스무 살이 된다한들
머리로 계산기 두드려가면서 남자의 조건을 비교분석할만큼
두정엽 부분에 주름이 쪼글쪼글 잡혀있지 않기에,
나는 나의 처녀성을 빌미로 안착할 수 있는 남자를 고르지 못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내 안에 타인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넘쳐날 때, 한 번이라도 더 사랑에 매진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점점 더 영악해져가는 주변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나는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아,
그렇다고 헌신을 다해 소년들을 키우기엔 어중간해져 버린,

이제 나에게도
어린 남자와 영악한 어른의 문턱을 넘고 있는 남자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잘 잡아야하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온 것이다.
내 나이 즈음의 여자들이 갖춰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뻔하고 말로 하기 쉬운
서점에 가면 널린 처세술 서적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자기 긍정>이다.
나는 내가 좋아. 나는 매력있어.
긍정할 구석도 가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마인드 컨트롤이나 하고 있으란 얘기는 아니다. (그딴 건 망상이 되기 십상이다)불안에 떠느니, 자신의 외면이나 내면에 영양분이 될 것들을 찾아 마구 흡수하고
지금의 어중간함을 진정한 자기 발전의 적절한 동기로 삼아 자신에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내 '서른'이라는
나이의 타이틀이 너무 오래된 것 같고
내 눈가의 주름이 너무 깊은 것 같고
내 사랑의 열정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는

내 안의 스무 살 여자아이보다 순수하고,
주름의 깊이만큼 사려깊고,
오랜 숙성을 거친만큼 좋은 사랑- 을 가진 서른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라면
내 쪽에서 이미 No, No, No 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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