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지 않을 핸드폰 벨소리였다.

그 그룹에 들어간 번호는

한 번도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마무리가 덜 된 업무로 인해 퇴근도 못하고

쌓이는 눈의 피로감 때문에 커다란 책상에 축 늘어져 엎어져서는

내 방의 퀸 사이즈 침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침대의 이불에 맨살이 닿는 느낌을 상상하며 멍해져서는

정말 그게 내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응? 고개를 돌려 반짝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그제서야 발견하고서는

아, 이 아이가 지금 울고 있구나.

낯선 벨소리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준이었다.

의례적으로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밥을 한 번 같이 먹긴 했지만

가끔 서로의 다른 일행들과 술을 마시다 합쳐지는 술 자리에서 술 잔을 부딪히긴 했지만

결코 이 시간에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사적인 사이가 아니여서

참 의외의 발신자네. 라는 생각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요?

노곤노곤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

 

 

나도 모르게 내일 아침에 진행할

신경이 예민하다고 소문난 인터뷰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긴장했었나보다.

 

 

 

 

아, 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책 읽으면서 맥주 한 캔 마시고 있었어요.

 

 

아, 반갑네요. 이렇게 전화통화를 하게 될 줄이야.

 

 

반갑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사람 목소리가, 오로지 나와만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의 목소리가 참 그리웠는데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잘 지내죠?

 

 

 

 

수화기 넘어로 얕게 깔려있는 음악이 넘실거리며 내게 전해졌다.

한 때 꽤나 중독되어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色彩のブル ス.

준과 어색하게 첫 인사를 나누었을 때도 흘러나오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준은 자신의 현재 근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는 요즘 살이 좀 빠졌어요.

 

 

그러면 안 되죠. 또 얼굴살 엄청 빠진 거 아니예요?

 

 

아, 마지막에 봤을 때 그때보단 살이 좀 붙었었다가 지금 다시 빠지고 있는 중.

머리도 눈이 보이게 잘랐어요.

 

 

아, 머리 길 땐 강아지 같았는데,

 

 

으흠. 그랬나요?

오랜만에 쉬면서 CD를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근교로 드라이브를 하러 갈 때, 

준도 일행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원래 운전을 맡기로 한 친구 녀석이 약속을 취소하면서

준을 투하시켜 놓고 빠졌던 것 같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뒷좌석에 앉은 녀석들은 다 골아떨어지고

웬만해서는 움직이는 것 안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선곡이 좋으네요.

 

 

그 CD, 가지세요.

 

 

준은 조용히, 그리고 참으로 안전하게 운전을 했고

나는 조용히, 그리고 참으로 심심하게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이 참 좋았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은 뭐랄까. 내가 빠져들고 마는 그런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준도 나를 좋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특별히 남다르게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준이 빠져들만한 그런 타입의 여자는 아니었다.

 

 

뭐랄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데

연인은 되지 않는.

 

 

그렇다보니 서로에게 살가울 필요도 없고.

애써 잘 보이기 위해 서로에게 내뱉는 말에 슈가코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고 받은 말들은

건조하고

또 간단했다.

 

 

 

준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또 한 번,

아, 좋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낮게 깔린 참 듣기 좋은 목소리.

남자의 그런 목소리는

오늘 같은 날엔 피로회복제 같은 것이다.

 

오해하지 않고, 그걸 즐길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좋았다.

 

 

아마 준에게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가 그런 효과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워요. 전화해줘서.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곤할텐데 어서 자요.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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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어폰에서는 에디 해리스의 색소폰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서는 옅은 담배 냄새가 났고, 그 순간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담배를 서랍에서 꺼내 불을 붙이고 입에 무는, 그 일련의 행위들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타쿠미씨와 이별한 날, 무기력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때가 된 것 같아.
그걸로 내가 납득할 거라 생각해? 여자라도 생긴거야?
그렇게 보여?
아니. 아니 몰라. 모르겠어.
아니야.
그런데 왜? 왜?
 
 
 
 
 
사랑이 시작될 때는 둘 다 제대로 작동했는데 어째서 고장난 기계마냥 한쪽만이 끝을 말하는 거지? 어째서 나는 그런 징조조차 느끼지 못한거지? 타쿠미씨의 집에서 머물 생각으로, 20kg짜리 여행용 캐리어에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넣어가지고 왔다. 오늘을 기념하려고 타쿠미씨가 좋아하는, 당근을 아주 잘게 썰어넣은 닭죽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에는 맛난 냄새들이 가득한데 군침도는 냄새를 맡으면서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나누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지금도 타쿠미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 어쩔 줄 몰랐다.
설령 내 눈을 보면서 내뱉는 말이 이별통보라고 할지라도 내 심장은 아직도 타쿠미씨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애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을 한다.
그랬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유일한 방식으로 타쿠미씨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럴 때 흘러나오는 음악이 '러브 테마'라니. 에디 해리스의 색소폰 연주는 기분에 따라 그 음색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기본적으로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라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타쿠미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들은 색소폰 연주는 마치 나를 놀리는 것처럼 경쾌하게 들려서 분했다.
 
 
 
 
타쿠미씨는 본인이 헤어지자고 말해버리고서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을 보고 나는 묘하게 안심이 되어 그의 눈과 뺨에 키스를 하면서 그 눈물을 핥아주었다. 타쿠미씨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타쿠미씨는 나를 밀어내려고 했고, 우리 사이에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적잖히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타쿠미씨를 감싸고 있던 팔에 더 힘을 실었다. 차라리, 차라리 그의 목을 세게 졸라서 내 손으로 그를 죽여버린다면 그래서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얼굴을 자꾸 돌리려는 그의 턱을 세게 붙잡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면 목을 꺽어버리겠다는 심정을 담았던 손에 힘이 점점 빠졌다. 타쿠미씨의 호흡도 살짝 가파졌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성을 다해서 타쿠미씨와 섹스를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이 바뀌진 않을까. 마음을 바꿔주었으면 하는 거대한 바람으로 그를 꼬옥 안았다.내 마음을 전달하려고 했다.
 
 
 
내게 처음으로 춤을 가르쳐 준 사람이 타쿠미씨였다.
 
파트너와 추는 춤은 섹스할 때와 같은 교감이 필요해.
 
그런 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의 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왠지 모르게 야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몸을 최대한 밀착시켜서 추는 블루스이기 때문에, 끈적이고 느끼한 블루지한 재즈 음악이 흐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둘의 블루스는 담백했다. 굳이 몸을 붙일 필요도 없었다. 어떤 음악에도 블루스를 출 수 있었다.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출 때는 항상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머리로 예측하려들고, 파트너를 믿지 못해 신호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이고 말았지만 타쿠미씨와는 음악만 있으면 그저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안에서 나를 놓을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타쿠미씨와 나 사이에 춤은 섹스만큼 중요했다.
 
 
 
 
 
 
나는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야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우리는 헤어질 수 없어.
타쿠미씨도 힘들게 꺼낸 말을 지키지 못할지도 몰라.
 
타쿠미씨를 설득하려 했던 나는
타쿠미씨와 섹스를 하고 난 뒤, 오히려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타쿠미씨의 집에서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울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거라고 타쿠미씨가 예상할 수 있는 시간 즈음, 타쿠미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들어갔지? 괜  찮은 거지?
 
헤어진 마당에도 안부를 묻는 꼴이라니.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는 엉엉 소리내서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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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책이 없다. 출근길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울어버리다니, 그러나 내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니 새삼 지금에 와서 부끄러울 건 없다. 그러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내 모습을 비추고 있던 지하철 문이 열렸고 하필 논현역에서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도영 씨가 지하철을 탔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나는 문 가운데 서 있었고, 도영 씨는 지하철을 타려다 울고 있는 나를 목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넋 나간 것처럼 헤- 웃으며 여기서 타는 군요! 라고 말했다. 도영 씨는 내 뒤에 서서 네. 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행이야. 옆에 서지 않아서. 고개를 힘겹게 뒤로 돌려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지. 뒤에서 느껴지는 도영 씨의 가늘고 긴 몸에서는 여름의 풀잎 냄새가 나는 듯 했다.

혹시 도영 씨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을 걸지도 모르니까 왼쪽 귀의 이어폰을 뺐다.
'너가 좋아했던 살구빛 샐러드 그날은 샐러드 기념일'
순간 그런 닭살스러운 노래가 새어나와 지하철 안에 얕게 퍼졌다.


 

이건 에쿠니가오리 탓이다.
<호텔 선인장> 때도, <홀리 가든> 때도,
<반짝반짝 빛나는 때>는 아예 엉엉 소리내며 울어버렸다.

나는 신지에게 녹신녹신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람피우는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됐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인간은 바람을 피우지 않곤 살 수 없는 생물이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전심전력으로 녹신녹신해진 채 태연히 살아갈 순 없다.


라는 문장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이 여자 뭐야. 무장해제의 상태인 나에게 미끄렁거리며 다가와서는 찌릿하고 감전시켜버린다. 전기가오리 같은 여자.

 

 


 
직장에서 가까운 집을 내팽개치고는 무작정 희우의 집으로 들어왔다. 희우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희우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집과 재산, 그리고 어마어마한 보험금까지 받았다. 3인 가족이 살기에도 커다란 아파트. 희우는 나에게 우리가 함께 잠들 침실을 보여주었다. 서재로 쓰고있는 깔끔하고 아담한 방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 옷을 수납할 수 있는 빈 옷장과 잇몸 건강에 특히 도움을 줄 것 같이 생긴 칫솔을 내주었다.



밝아오고 있다는 걸 몸이 먼저 느낀다. 아침이 오는 것이다. 몇 분 혹은 몇 십 분 후에는 알람이 미친듯이 울리겠지. 나는 희우의 등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킨다. 희우는 잠결에 돌아누워 나를 꼬옥 안아준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희우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넣는다. 따뜻하다. 36.7도의 따뜻함이었다. 사람의 정상체온 36.7도 정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희우를 만나고 나서부터 내 몸의 온도는 서서히 상승해서 튀김을 튀겨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희우의 체온은 36.7도 정상인듯 했다.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희우와 떨어지기 싫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나는 성실한 회사원 모드로 출근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알람이 울리는 유예 시간이 올 때까지 희우를 꼭 붙들고 있는다. 희우는 그런 맘도 모르고 잠에 취해 건성으로 나를 안고 있다. 토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커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프로젝트를 하나 더 맡았다. 
바빠지기 위해, 정신을 혹사시키기 위해 일을 늘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머리 속은 온통 희우 생각으로 가득 찬다. 뭘 하고 있을까? 점심은 뭘 먹었을까? 누굴 만나고 있을까?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규격화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나에 반해서 뭘해도 상관없는, 굳이 뭘 해야할 필요도 없는 희우의 삶은 나에게는 물음표 투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의 하루로 인해 나는 미칠 것 같은 불안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를 때 즈음
희우는 일어나서 얇은 이불을 둘둘 말아 바닥에 끌며 화장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뒤에서 안아준다. 나는 몸을 살짝 돌려 팔로 희우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그의 배에 귀를 가져다댄다. 이렇게 희우의 몸에 매달려있으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그의 내장이 내는 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아 안타까워진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몸을 떼어내니 희우가 말한다.

"꼭 출근해야 해? 어제도 회의한다고 늦게 들어왔잖아."
직장생활을 해 본 적 없는 희우는 저런 말을 잘도 내뱉는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지만, 희우가 책임감없는 남자가 될까봐 겁을 먹는다.난 말야, 잘하는 남자도 좋지만 맡은 바 일에 충실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가 좋아.
"내 얘기하는 거야?"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희우의 말에 불안한 내 마음이 묘하게 진정되었다. 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그의 견갑골에 입을 맞춘다. 진분홍색 입술 자국이 남은 그의 하얀 속살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아림은 이번에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부연 설명 따윈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꿰뚫어본 것처럼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푹 빠져 있으니까 말야."

 



산 미구엘을 비우고 레페 브라운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재윤은 자신이 피우던 쿠바산 시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한 번 해봐요."
맥주의 기운 때문인지 선뜻 그걸 받아들고는 가볍게 빨아들였다. 시가의 향이 나쁘지 않았다.

퇴근을 하면 6시. 일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희우 품에 안기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한다.
밀리는 버스도 싫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녹초가 되는 것도 싫다. 순간이동을 해서 곧장 희우 곁으로 가고 싶어진다. 희우의 냄새를 킁킁킁하고 맡고 싶어졌다. 이런 내가 모자르고 바보같아서 배회하다 들어간 곳이 재윤이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재즈바였다. 몇 시간을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호가든을 마셨고, 아사히도 비웠다. 취하진 않았다. 재윤은 Inger Marie의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바를 사이에 두고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너무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쓸쓸해지고 자신없어지는 이 아이러니를 견딜 수 없다. 나는 조금씩 몸을 뒤로 뺀다. 재윤은 조급히 그만큼 몸을 밀어붙인다. 재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 블라우스 셔츠의 단추를 푼다. 내 몸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 재윤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나를 연출할 수도 있고, 타고난 재능대로 그를 놀려줄 수도 있다. 희우 앞에서는 무능한 상태로 녹아내려버리고 마는 내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존재를, 나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재윤과 잤다. 아니 섹스를 했다.

 


아림은 자다라는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대신 행위만을 의미하는 <섹스>로 교정해주었다.
"뭐 어때. 좋았으면 된거 잖아."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꽤 거칠 것 같았던 재윤은 의외로 섬세하게 나의 반응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가학적으로 나를 탐했다면 그 순간 멍청한 나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윤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희우와 나는 천생연분이었다. 처음 해 본 연애였지만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나한테만 딱 맞는 것이었다. 희우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격정적이지 않았고, 일상적이며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독하게 고독해지는 까닭은 희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아무 것도, 아무 의미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희우가 재윤에 대해서 안다면, 도영 씨에 대해서 안다면, 일본에 출장가서 만난 타쿠미씨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슬퍼질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photographed by Patrick Demarchel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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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은 바닥에 가득한 풍선들을 발로 툭툭 차며 들어왔다.
"
뭐야, 이것들은
?"

너한테는 말해줄 수 없는 것! 혼자 속으로 외치곤 희정이 건네준 기름기가 베어 나온 튀김봉투를 갈랐다. 희정은 답이 없자,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며 입을 삐죽거렸다.

 

료와 먹을 땐 고소하고 바삭한 맛있는 튀김이었는데 말야.
"
그런 소리 내뱉을 거면 왜 사람을 생고생시킨 거야
?
상수역에서 너네 집까지 튀김 냄새가 진동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사왔더니. 먹지마
!"
포장해서 들고 오는 동안 식고 눅눅해졌기 때문에 맛의 차이가 나는 게 아니었다
.



나도 알고 있었다. 희정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
희정은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열이 받아서는 료와 나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료와는 4년째 연애 중. 앞으로도 별 일이 없는 이상 그와 연애를 지속할 것이다.
둘이 함께 살 계획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이라는 성취단계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불투명하다
.
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료나 내가 하는 일이 바쁠 땐 만나지 못하는 시간의 터울이 길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희정이 정의하는 연애에서 보자면 무심하기 짝이 없어서
희정은 료만 떠올리면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진다.


"지금과 같은 상태, 잘도 견딘다
."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방식으로 나를 내버려두는 ''를 사랑하는 내가 못마땅한 것이다.

 

료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부드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엄살부리는 것을 받아주고 토닥거려 줄 정도로 너그럽지는 않다
.
료는 서로가 시간을 많이 공유한다거나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싫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자기 몫의 외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게 하지 않으려면 그걸 즐기라고 했다.

 

"그 정도로도 만족이 되는 거야?"
우리는 떨어져있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깊고 묵직한 사랑을 나눈다.

 

료는 수컷 늑대 같은 면이 있다.
출신 직전의 암컷에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정하게 군다
.
새끼들이 어미 몸 밖으로 밀려나오고 하나,둘 굴 밖을 무사히 걸어 나오게 되면 그런 행동도 끝이다
.
암컷이 임신하고 있을 때는 먹을 것도 가져다 주던 수컷은

암컷이 몸을 풀고 나온 뒤, 사냥한 먹잇감에 먼저 입을 대려고 하면
혹독하게 암컷을 위협하고 서열을 재확인시켜준다. 둘은 독립체가 되는 것이다
.
다행히 료와 나는 서로 동등한 서열이다.

 

"내가 보기엔 네 긍정 에너지가 과도한 것 같아."

 

하지만 항상 먼저 료가 달려드는 걸
어쩔 땐 료를 위해 일주일 전부터 고르고 골랐던 속옷을 보여줄 여유도 없이
나에게 달려들어 우리 사이에 거추장스러운 그런 것들을 후다닥 처리해버리고는
하루 종일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도 있어.
배가 고파서 탈진할 정도가 되면
료는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서 침대로 가져온다구.
그러고 나면 료는 내게 양치질할 시간만 줘.

 

희정은 그걸 의무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에게 안기면 의무감은 느낄 수 없다.
의무감만으로 날 안는다면 예민한 나의 몸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에게 안겨있으며 끝없이 긍정할 수 있는 기운을 받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니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들해지지 않고 잘 지내는 거야.
우리가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게 될 수 없어. 특별하지.
료와 함께 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오감을 집중하게 돼.

 

료와 48번을 만나면서 수치적 데이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겠지만
각각의 데이트에서 느낀 감정은 생생하게 몸에 기록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불러일으킬 수 있어.

 

그렇게 말해도 희정은 료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료 앞에서는 곧잘 강해진다.
그러나 료가 만나고 난 뒤, 혼자있게 되면 꼭 며칠동안은 안절부절 못하고 감정기복이 심해진다.
내가 그렇게 되는 걸 희정은 알고 있다.
희정은 애정결핍 상태가 되어버린 내가 보기 싫은 거였다.
그러나 나는 ''를 사랑했다.
며칠이 지나면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료를 기다리는 행복을 누린다.

 

"그런게 사랑이야? 내가 보기엔 가끔식 욕구를 채우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인, 허울좋은 구실인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료가 곁에 없는 나는 약해빠졌으니까.
하지만 나의 불행을 자초할 순 없어.
료와 헤어지지 않는 이상, 선택권 따윈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료의 애정을 믿는 것 밖에.

 

희정의 긴 잔소리 끝은 명함 한 장이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료를 넋 놓고 기다리지만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보라고 했다.
료만 만나니까
세상에 그런 나쁜 놈에게 동화되어
더 근사하고 나에게 집중할 남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거라고 했다.

 

희정이 돌아가고 혼자 방에 남은 나는
적당히, 알맞게 공기가 빠진 풍선을 골랐다.
그리고 풍선 주둥이 쪽에 가위로 살짝 구멍을 냈다.
풍선에서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붙자 풍선은 팽그르르 돌며 자기 안의 공기를 내뱉었다.

 

료의 숨결

.
료의 이산화탄소

 

 

료가 잔뜩 불어놓고 간 풍선에 구멍을 바람을 빼내며
나는 료가 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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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포즈로 벽에 기대려다 살짝 부딪힌 팔이 아파,
늘어진 티셔츠 사이로 어깨를 빼 거울에 비춰보니 멍이 들어 있었다.
깨문 자국이 번져 푸르스름한 멍이 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거칠게 나를 안은 그는 내 팔을 물었다.
참기 힘든 아픔을 느끼고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오히려 그는 그 힘을 반동삼아 턱을 더욱 꽉 다물었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체념한 듯 고통을 받아들이자 그제서야 물고 있던 나를 놓아주었다.
잠깐의 순간, 빈틈의 시간에 안도하고 있을 때
그는 또 다시 같은 자리를 물었다. 

 

재미있다고 여겼다.
장난보단 심한, 그러나 극한의 경험도 아닌
자극적이고 흥분되는 재미였다.


나는 멍든 자국을 지긋이 눌러보았다.
통증이 남아있다.
그날의 기억이 내 몸에 함께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를 만나는 것은 모험이다.
분명, 이전의 나는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경계를 허문다.
완전무장된 나를 흐트려놓는다.

 

 

아주 단순하게도
그에게 안겨있는 동안은
나 자신에게서 꽤 멀리 떨어져 나오는 것 같아
그 기이한 경험이 즐겁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결론나지 않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나에게서 완벽하게 벗어나진 못한다.
한 발은 언제나 붙잡혀서
행동 반경이 정해져있는 일탈을 할 뿐이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라고 작은 만족을 하려한다.

 

 

그럴 때 그는 내가 경험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무엇인가를 늘 강요한다.
제시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건
종국엔 거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1차원에 머문 쾌락 앞에 나는 쉽게 경계를 허물고 만다.

 

 

 

그가 시도하는 모방된 욕망 행위는
상대의 만족보다는 자신을 확인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엉켜있는 둘의 모습을 거울로 반드시 확인하고 마는
그의 나르시즘 속에서도 느껴지는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확연한 자만심이다.

 


그를 알고 지낸 시간 동안
그에 대한 환상은 제법 훼손되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몸에 멍이 남을지언정
더 이상 그로 인해 내 심장이 아프진 않아.

 

 

어떤 감정들은 잘 차단된다.
계산된 것은 아니지만,
아프거나 다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마음은
순간의 달콤함을 위해 간사한 미소를 띄게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매력이 있고 안고 싶은 남자다.
단지, 내 마음의 경계까지 풀 순 없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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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화를 내며 던져버렸던 선풍기는

다행히도 부서지지 않았어.

여름 밤의 온기를

식혀주는 바람을 여전히 만들어 내고 있어.

물론 예전보다 털털털거리는 소리를 좀 더 크게 낼 뿐이지.

선풍기 바람은

눈물도 말려주지.

 

 

 

 

서로에게 서로가 보이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닿지도 않는 말을 하고

 

서운한 것이 많아.

하지만

한순간도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지.

그게 참 슬퍼.

 

 

 

슬픈 일이지.

널 견딜 수 없다면

즐겁지 않다면

쉬울 수도 있었을텐데.

 

 

 

 

타이밍이라는 게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면

항상 최악.의 타이밍이지.

 

내가 우울할 땐

너도 우울해.

그래서 나를 달래줄 기운 하나 가지고 있지 않지.

투정부리고 싶은데

애써 밝은 목소리를 가장하고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던진 질문은

너의 짜증을 가중시키고

넌 나쁜 목소리로 대꾸하지.

 

 

 

나는

조용히 조용히

가라앉아서는

 

'아, 질릴만한 여자.'

 

나 자신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지.

 

그 말이

나를 더욱더

질리는 여자로 만드는 것인지도.

하지만 실은 사랑받고 싶은 거잖아.

 

 

 

 

알아. 이런 기분일 땐

파헤쳐선 안돼.

그 기분을 분석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울해지지.

그냥 눈물을 흘려. 소리내서 울어.

이런 기분일 땐

누군가 대화해서도 안돼.

상처받을 수도, 되려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상태니까

 

 

그런데 왜 나는

머리로 아는 것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주파수는 너인걸까?

아프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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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S랑 잘 거야."

K의 이런 발언에 놀랄 친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K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은 까닭은

그 대단한 결심을 선포한 곳이 거리낌 없이 Girl Talk를 나눌 수 있도록 공간 분리가 잘 되어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보다 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전시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은 미술관이라서 당연히 K의 무리에게 불편한 시선이 모였다.

이런 K의 단순한 성격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좀 작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미술관 옆 카페테리아로 K를 끌고 나온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우정은 무관심한 일에도 적절한 관심과 코멘트를 필요로 한다.

"S? 그 S? 애저녁에 헤어졌잖아?"

"그 새끼를 다시 만나겠다고?"

"다시 만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 거라고."

 

K와 S는 이미 3년 전에 헤어진 사이였다.

헤어졌다는 말보단 K가 일방적으로 차였다고 하는 게 옳은,

한 줄로 그 관계를 요약하자면 “K보다 나이도 어린 S가 순진한 K를 데리고 놀다 버린 것이었다.”

 

뭐, 여기서 순진함이란 마음이 꾸밈없고 참된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도 그 의심을 억지로 지우고 자신이 세워놓은 사랑의 정의를 믿는 순진함이었다.

S와 관계에서 처참히 박살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신되지 않는 전화를 걸고,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불면의 밤을 수없이 보내고,

자신의 괴로움을 반복적으로 토로하면서 친구들을 괴롭혔지만 친구들은 그런 K를 미워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각박한 세상에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죄악이라며, 자신의 눈을 핑크빛 하트로 만든 남자를 찾았다고 했다.

 

 

 

 

 

"너, S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사랑이 아니란 걸 알아. 사랑하지도 않아. S도 날 사랑하지 않아. 우린 솔직하지 못했어.

서로 원하는 건, 몸뿐이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난 무서웠거든. 그런 선택을 한다면 사랑을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속여서라도 S를 사랑한다고 말해야했었어.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나에게 최면을 걸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도 돼.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싶어. 사랑은 그렇게 얻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것이라도

욕망하는 것을 손아귀에 쥐고 싶어."

 

 

 

"어떻게 다시 만나려고?"

 

인생은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걸 L,M,N의 남자들을 만나 오면서 깨치고도 도가 텄을 K임에도

머릿속으로 짜놓은 시나리오들을 줄줄이 읊어낸다.

K의 구성은 그동안 읽어왔을 삼류연애소설의 변형 판이었지만,

그 순간 K는 절실해보였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별 후에는 자학 증상이 나타나긴 한다지만 이건 좀 수위가 높아. 감정적으로 더 망가지려고 작정을 한 거야?"

 


"나도 자신 없어. 다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순 없어.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그 사랑이, 내게 치명상을 입힐 준비를 하고 벼르고 있는 세상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잖아.

난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던 대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현실감 있게 원한 적이 없어.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지도 않았어. 내게 입 맞춰 주는 입술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남자들의 페니스도 똑바로 본 적 없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게 되면, 구두 뒤 굽을 두 번 톡톡 치면

캔자스 외딴 시골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도로시가 되어버릴 것 같단 말야.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 10cm는 붕 떠있는 그런 관계

아직 정해진 게 하나 없는 불안한 어린 영혼인 나에게 사랑은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환각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어.

내게 사랑은 엑스터시나 LSD같은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 사랑이 나에게 치명타를 날렸어.


너희들도 알잖아.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순간, 그 순간들이 날 어떻게 배신했는지.

그 사람이 내게 원한 것은 현실이겠지만 난 그렇게 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쳐갔겠지.

 

알아. 내가 잘못한 걸 알아.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현실이 힘겨웠다고

그래 지금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지금의 내 상태도 현실에서 더욱 더 도망치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아.

난 이 세상에 당당하게 발을 붙이고 서 있기엔 나약하고 존재감마저도 미약하니까.

그나마 S를 원하는 건, S의 그것을 내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이잖아."

 


자기변명 밖에 지나지 않는 말들을 내뱉는 K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친구란 이름으로 K의 계획을 들어주며 동조해주거나

그 계획이 무산되거나 트러블이 생겼을 때 술 한 잔 기울여주면 그만이다.

 

이러니저러니 하며 K를 걱정해주는 것도 k의 귓가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동의만을 바라는 K에게 뭔가 충고를 하면

K는 자기 합리화의 대사를 읊어낼 것이며, 그걸 들어주는 것이 더욱 귀찮은 일이었다.

 

그때였다.

 

"사랑은 진정,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패가 될 수 없는 거니?

그럼 너는 이제 사랑을 믿지 않는 거지? 더 이상 사랑이니 뭐니 그런 말에 기대하지 않을 거지?"

예상치 못한 반문을 받은 K는 당황했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을 믿는 게 두려워.

적당히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래."

 

 

"넌 여기 와서 붕 떠있는 연인들 그림을 보면서

너의 현실 도피적 성향에 동조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K의 친구 중 하나가 전시회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샤갈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저거야.

샤갈의 사랑은 발이 없으며, 무게 또한 없어.

언제 어디서나 사랑할 수 있고, 그것은 그 무엇에도 제약을 받지 않아.

때문에 샤갈이 만들어낸 사랑의 사전에야 말로 불가능이 없어."

 

 

흠, K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발이 달려있고, 내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그런 태도로는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거야.

넌 약한 척하며 자신감이 부족한 척하며 누군가의 보호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 누군가도 필요 없을 정도로 너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잖아.

넌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너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잖아.

그러니 네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 거야.

네가 말한 현실도피란 사랑하지 않겠다. 나의 존재만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거잖아.

넌 너 자신을 잊어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순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샤갈의 그림이

K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지성이 결여된 K.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 있지 않는 K에게

샤갈의 그림은 아직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런 K이지만,

사무치게 한 남자가 그리웠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많이 아팠을, 그래서 결국 이별을 고하기로 마음먹었을

자기 밖에 바라보지 않고 있는 K였음에도 사랑해보려고 했던 그 남자가 그리웠다.


그 남자를 지워보려고

이별의 상태가 너무 힘겨워

다른 남자라도 안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유치하고 부끄럽고 화가 나고 어쩔 줄 모르겠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한 곳은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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