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지 않을 핸드폰 벨소리였다.
그 그룹에 들어간 번호는
한 번도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마무리가 덜 된 업무로 인해 퇴근도 못하고
쌓이는 눈의 피로감 때문에 커다란 책상에 축 늘어져 엎어져서는
내 방의 퀸 사이즈 침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침대의 이불에 맨살이 닿는 느낌을 상상하며 멍해져서는
정말 그게 내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응? 고개를 돌려 반짝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그제서야 발견하고서는
아, 이 아이가 지금 울고 있구나.
낯선 벨소리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준이었다.
의례적으로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밥을 한 번 같이 먹긴 했지만
가끔 서로의 다른 일행들과 술을 마시다 합쳐지는 술 자리에서 술 잔을 부딪히긴 했지만
결코 이 시간에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사적인 사이가 아니여서
참 의외의 발신자네. 라는 생각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요?
노곤노곤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
나도 모르게 내일 아침에 진행할
신경이 예민하다고 소문난 인터뷰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긴장했었나보다.
아, 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책 읽으면서 맥주 한 캔 마시고 있었어요.
아, 반갑네요. 이렇게 전화통화를 하게 될 줄이야.
반갑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사람 목소리가, 오로지 나와만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의 목소리가 참 그리웠는데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잘 지내죠?
네
수화기 넘어로 얕게 깔려있는 음악이 넘실거리며 내게 전해졌다.
한 때 꽤나 중독되어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色彩のブル ス.
준과 어색하게 첫 인사를 나누었을 때도 흘러나오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준은 자신의 현재 근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는 요즘 살이 좀 빠졌어요.
그러면 안 되죠. 또 얼굴살 엄청 빠진 거 아니예요?
아, 마지막에 봤을 때 그때보단 살이 좀 붙었었다가 지금 다시 빠지고 있는 중.
머리도 눈이 보이게 잘랐어요.
아, 머리 길 땐 강아지 같았는데,
으흠. 그랬나요?
오랜만에 쉬면서 CD를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근교로 드라이브를 하러 갈 때,
준도 일행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원래 운전을 맡기로 한 친구 녀석이 약속을 취소하면서
준을 투하시켜 놓고 빠졌던 것 같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뒷좌석에 앉은 녀석들은 다 골아떨어지고
웬만해서는 움직이는 것 안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선곡이 좋으네요.
그 CD, 가지세요.
준은 조용히, 그리고 참으로 안전하게 운전을 했고
나는 조용히, 그리고 참으로 심심하게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이 참 좋았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은 뭐랄까. 내가 빠져들고 마는 그런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준도 나를 좋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특별히 남다르게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준이 빠져들만한 그런 타입의 여자는 아니었다.
뭐랄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데
연인은 되지 않는.
그렇다보니 서로에게 살가울 필요도 없고.
애써 잘 보이기 위해 서로에게 내뱉는 말에 슈가코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고 받은 말들은
건조하고
또 간단했다.
준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또 한 번,
아, 좋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낮게 깔린 참 듣기 좋은 목소리.
남자의 그런 목소리는
오늘 같은 날엔 피로회복제 같은 것이다.
오해하지 않고, 그걸 즐길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좋았다.
아마 준에게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가 그런 효과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워요. 전화해줘서.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곤할텐데 어서 자요.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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