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동생 방을 청소해주다가 책상 밑에 놓여있던 팩색에서 '원초적 본능'을 발견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개봉 당시엔 미성년자였기에 보지 않았던 영화. 무삭제 감독판이라니 호기심도 생기고해서 비디오의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전라의 남녀가 영화 초반부터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곧이어 여자는 남자의 몸 위로 올라타더니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어버린다. 그렇게 주도권을 행사하며 허리를 유연하게 사용하는 샤론 스톤을 보고 있노라니 살짝 호흡이 가빠지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자인 내가 봐도 흥분되는 섹스씬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에로틱스릴러 장르에서 이를 능가할만한 영화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영화 <원초적 본능> 중에서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내가 상대방을 묶는 건 몰라도, 내가 묶인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한 후배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저는 침대에 묶여서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남자친구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제가 변태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요?" 나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왜 묶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단순하고 간단하게 답하자면 늘 비슷한 패턴의 섹스가 재미없어진 것이다. 늘 하던 대로가 아닌 새로운 방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묶이는 것일까? 미디어에서 다루는 뻔하지 않는 방식 중에서 그나마 그것이 손쉬운 축에 속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위기구를 이용한 섹스, 애널섹스, SM플레이, 역할극에 비하면 실크스카프로 손목을 묶이는 게 덜 번거롭고 덜 부끄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에 밴디지를 이용하는 것이 '나 변태?'라고 고민할 문제인가? 둘이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했다면, 묶어놓은 상태에서 얼음송곳으로 찌르지 않을 것이라는 안전함이 보장된다면 무얼 하든 상관없다. 남들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지 않는가. 어떤 식으로 즐길지 선택하는 것은 둘이 결정할 문제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나는 묶이는 걸 원해'라고 말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관계라면 후배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둘 다 모험심이 강하고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타입이라면, 섹스를 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섹스만을 위한 관계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에다가, 한쪽이 섹스에 있어서 점잖은 타입라면 내 욕구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묶인 채로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변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말도 못하고 답보상태를 유지한다면 욕구불만의 게이지는 점차 상승하고 말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해보고 싶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설령 '에잇 변태'라는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안하면 된다.

의중을 묻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싫다고 했는데도 찌질거리며 하자고 매달리는 게 나쁜 것이다.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손을 묶는 정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불편이다. 변태적인 요구가 결코 아니다. 베개 밑에 숨겨놓았던 실크스카프로 그의 몸을 쓸어주듯 애무하며 교태를 부리며 말해보라. 그런 분위기에서 정색하며 싫다고 말한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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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씨와 처음 맞이하게 된 크리스마스, 나는 그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카르멘 일렉트라의 '에어로빅 스트립티즈'라는 동영상을 구해 스트립쇼의 기본 동작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유연함과 섹시한 웨이브를 겸비한 뒤, 이번 이벤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의상을 갖추기 위해 속옷 가게를 뒤지기 시작했다. 티팬티와 가터벨트, 그리고 망사 스타킹 올블랙 세트로 완벽하게 준비한 뒤 시착을 해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슈퍼섹시였다. 자신감이 한껏 상승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결 들뜨고 북적거리는 곳에서 솔로부대들이 질투할 만큼 다정한 시간을 보낸 뒤,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애인씨를 침대에 앉혀놓고, 그루브한 음악을 틀었다. 나는 그 음악에 맞춰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씩 풀었다. 그 역시 조금씩 벌어지는 블라우스에서 눈에 떼지 못했다. 이후 전개는 당연히 격렬하고 흐뭇한 밤을 예상할 것이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체크무늬 플레어스커트를 벗어던지는 순간, 애인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읽게 되자, 나는 속옷 차림으로 굳어버린 채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한기를 느껴버렸다. 준비한 동작은 아직 많이 남아있고, 음악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불 속으로 도망쳐서는 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아버렸다.

한 속옷브랜드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남성의 73%가 가장 선호하는 속옷으로 티팬티와 가터벨트, 그리고 망사스타킹을 골랐다. 실생활에서 그런 속옷을 갖춰 입는 건 불편하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적 판타지로 남자들의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로망을 실현시켜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의 착한 애인씨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러나 애인씨는 73%의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템들은 과도하게 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속옷 차림이 된 내 모습을 보고 대퇴부에 자극을 느끼기 보단 지끈하고 두통을 느낀 것이다.

 

이불 속에서 누에고치 상태가 되어 있는 나에게 애인씨는 그런 야한 속옷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섹시하다는 말로 나를 위로하려고 했다. 하지만 얼마나 공들여 준비한 것인데, 표정 하나로 망쳐놓은 그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 민망해져 버린 마음을 풀기란 쉽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은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낼 순 없었다. 나는 애인씨의 계속되는 사과에 짐짓 못 이긴 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결혼 첫날 밤 입으려고 사놓았던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를 옷장에서 꺼냈다. 순백색의 레이스로 장식된 청순하면서도 로맨틱한 속옷이었다.

 

그 속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가터벨트가 열어주지 못한 환상적인 밤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73%나 되는 남성의 전형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였기에 원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여성의 성적 로망이자, 첫날 밤 여성들이 선호하는 속옷에 더 잘 반응해준 그였기에 레이스가 찢어질 정도로 격정적인,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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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스처는 확실했다. 키스를 나누다 나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의 팔에서 의지가 느껴졌다. 적당히 얇은 입술, 뾰족하고 단단한 턱을 지나 판판한 가슴까지 그는 나를 점점 아래로 보내려고 했다. 그의 몸에 딱 맞게 붙어 있는 팬티의 밴드 부분에 도달해서야 전두엽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졌다. 타이트하게 조여져있던 팬티를 벗겨내다 그의 페니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좀 더 핑크색이라면 좋을 텐데."

"그럼 넌, 결코 만족하지 못할 걸." 그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고요한 밤의 공기를 타고 나즈막한 혼잣말이 그의 귀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감정적인 반응을 잘 하지 않는 그였다. 그럼에도 발끈 한 건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페니스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거슬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고유의 색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 역시 타고나길 핑크빛 유두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페니스가 수줍은 핑크색이길, 그가 경험이 많지 않은 순수한 남자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 것 뿐이었다. 그렇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래로 내려갔던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오늘은 입으로 안 할래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그는 나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자신의 페니스가 핑크색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귀엽게 느껴지긴 했다. "베이비 핑크색의 페니스를 가진 남자는 아무래도 섹스 경험이 부족한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남자와의 섹스.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고 마는 남자를 네가 좋아할 리는 없다." 우리 사이에는 소용없는 감정적인 줄다기리는 집어치우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다시 자신의 페니스에 집중해달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의 페니스는 괜찮았다. 내 안을 빈틈없이 꽉 채우는 부피감이 느껴지는 느껴졌고, 내가 만족하기 전에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잘 했다. 다른 수식은 거추장스럽다. 그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나를 어떻게 다뤄야할지도 알고 있었다. 아니 여자를 잘 아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닳고 닳은 남자였다.

나는 그 능숙함이 지금 현재, 나에게만 제공될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안긴 순진한 부류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의 효용성에는 유통기한이 있었다. 그는 유통기한이 적힌 파인애플 통조림이 아니었기에 그 시기가 언제 올지 모를 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며, 우리가 쉽게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해줬더라면, 우리는 좀 더 오랫동안 섹스를 하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섹스로 가는 단계가 짧아졌다. 그에게 있어 섹스에 대한 욕망만이 순수한 영역이었다.
                                                                                                                                                                                                                                                                                                     그의 말대로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를 다룰 줄 모르는 남자에게는 흥미가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여느 여자들처럼 로맨스를 꿈꾼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왕이면 이번에는 영원한 사랑이 되길 바란다. 모순적인 태도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섹스를 한다는 느낌이 충만하길 바란다.

순간 이 남자와 무얼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스럽게 나를 지켜보았다. "이 일은 다음 번에 보상해줄게요. 오늘,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복잡한 마음으로 그에게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먼저 그곳을 나왔다.   

그는 섹스를 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기에 가벼운 관계라 할지라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은 무채색의 섹스가 아니라 핑크색의 로맨스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와 이제와서 사랑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몇 번의 로맨스를 통해 영원할 리 없는, 결코 일치되지 않을 사랑에 대해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버렸지만, 내게도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닌 로맨스에 의한 섹스가 필요했다. 그걸 느낀 순간에 몸만 즐거우면 된다는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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