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빼먹지 않고 한 일은 등교하는 길에 만화방에 들려 순정만화 3~4권을 빌리는 것이었다. 소위 멀티가 가능했던 나는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수업 중 필요한 대답을 추임새로 넣을 줄 아는 적극적인 학생이 교과서 뒤로 만화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선생님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가끔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음소거가 되고 만화책 속에 빠져들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터프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손목을 낚아채서 어디론가 끌고 나가다 마침 보이는 벽에 밀쳐놓고는 입술이 찢어지듯이 혹은 부르트듯이 둘 중 하나는 하게 될 듯한 거친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ゲ-ムの名は誘拐), 히라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g@me의 한 장면



‘아, 이런 키스를 하고 싶어!’ 소녀의 마음 속 가득 울려 퍼지는 욕망의 음성만 귓가에 들릴 뿐이었다. 여기서 주의! 그렇다고 아무나 그래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이 키스의 전제조건은 나도 마음이 가는 상대인데,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원하고 있음을 표현해주는 방식으로서의 격함이지,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서 억지 키스를 받고 싶은 마음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알고 있다. 연애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을 키워주는 순정만화의 폐해. 그러나 종이에서나 보던 그런 키스는 TV브라운관 속 드라마에서도 적극적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렇다보니 스무살, 학교 기숙사에 모여 친구들과 키스에 대한 환상을 공유할 때에도 대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바로 그런 키스였다.

환상이 가득하고 혈기왕성했던 그 시절에 격한 키스 사고는 내게 생기지 않았다. 내가 만난 현실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소심남이거나 매너남이었다. 서로 좋아하고 있는 게 뻔한데도 계속해서 키스할 타이밍을 놓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내 쪽이 엄청 안달을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 번도 키스를 해보지 않은 미숙한 상태에서 먼저 덤벼들긴 싫었다.

결국 어찌어찌하여 그와 키스를 하긴 했지만 몽롱하게 다리에 힘이 풀리며 뭔가 취한 듯 하면서도 짜릿한 키스가 아니라 다소 나의 환상과는 괴리가 있는, 수줍고도 밋밋한 무색무취의 물맛 키스였다. 결국 그 일로 말미암아 순정만화에서처럼 수동적으로 키스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먼저 키스하는 일은 쉬운 여자라서가 아니다. 키스로 상대를 조금 더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기기 때문이다. 단지 잘하고 못하고의 테크닉을 판단하는 건 아니다. 우선 내가 먼저 키스를 하고 싶을 정도로 섹시한 남자인가 하는 것. 경솔하게 키스를 남발하는 타입은 아니므로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다면 그만큼 내 눈과 마음에 꽉 차는 남자란 의미이다.

게다가 내가 먼저 한 키스에 대해서 ‘가벼운 여자’라는 식으로 곡해한다거나, ‘꼬신 건 그쪽이니, 굳이 내가 책임질 필요 없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남자인지 아닌지 재빠르게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내가 먼저 키스를 했던 남자 중에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키스 후 관계 정립이 손쉽게 되었다. 내 남자 획득! 그래서 남자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용지로 키스를 자신있게 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지 않고, 키스를 했는데 ‘정말 어디서 배워서 이 모양이야?’ 라는 생각이 드는 남자랑도 연애는 할 수 없다. 키스할 때조차 이기적인 혀놀림을 하며 나와의 리듬을 맞추지 않는 남자라면 옷을 벗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게다가 자신만만해하며 먼저 키스를 시도하는 남자들이야 말로 위험할 수도 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여성의 순정만화적 환상을 간파하고 그것을 연출할 줄 아는 잘 트레이닝된 바람둥이일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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