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폐렴도 앓았던 터라 추운 날에는 찬바람도 쐬지 않고 감기 증상이 약간이라도 보이면 재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스스로에게 질병계의 트렌드세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지만, 이번에 유행하는 무시무시하다는 독감에는 기필코 걸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하지만 독감군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병원침대에 누워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아픈 걸까요?”라고 징징거리는 환자 코스프레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멍석말이를 당한 것 같은 근육통과 마치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고열에 시달리고 내장의 배열을 바꿔놓을 듯한 끊임없는 기침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꾸준히 같은 병원을 다니다보니 선생님은 단호하고 명료하게 나에 대한 처방을 내려주셨다. “아무래도 현정씨는 사랑하지 않을 때는 면역성이 제로가 되는 여자인 것 같군요!”

연애 사건이 끝나면 실연한 나의 마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육체적 고통을 이끌어낸다. 그럴 때마다 병원을 찾게 되고 아픈 이유를 설명하다보면 연인과 헤어진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별을 스스로 말하는 일. 친구들에게도 미처 알리지 못한 사실을 의사선생님께 예행연습을 하듯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심인성이 원인인 위염이나 허리통증 같은 건 이별을 납득하고 내가 그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차도를 보인다. 하지만 다음 연애 사건 사이, 공백의 기간에는 나의 백혈구들은 파업 선언이라도 하는 것인지 바이러스성 질병이 퍼지면 어김없이 당첨이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신 의사선생님의 진단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네, 저는 사랑 없이는 시들어버리고 말거예요.” 의사선생님 앞에서는 다소곳이 그렇게 말했지만 병문안 와준 친구들 앞에서는 “정말이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섹스인 것 같아. 아무래도 좋은 섹스를 해야 이 빌어먹을 감기가 떨어질 것 같아!”라고 말해버렸다.

“맞아, 오메가3, 달맞이꽃기름, 비타민 그런 거 챙겨 먹는 것보다 정기적인 섹스가 훨씬 낫다니까.” 먹을 거 챙겨먹으면서도 짐승 남편 덕분에 결혼 3년차임에도 여전히 신혼생활을 즐기는 친구의 말에는 샘이 나고 말았다. “빨리 소개티잉~ 소개티잉~” 친구들 앞에서 스무 살에도 그러지 않았던 떼쓰기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자유방임과 스파르타식으로 단련된 우리의 우정은 ‘남자는 스스로 개척한다’를 기반으로 삼고 있기에 씨알이 먹힐 일이 없었다. “너, 아픈 거 맞구나.” 같은 반응이다.

"흥! 러브러브 파워! 에너지 충전! 이번 독감만 낫기만 하면, 내 목소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말테니까! 면역성이 바닥치게 만들지 않겠어!" 나는 침대에 누워 소리쳤다. 콜록콜록 끊어지지 않는 기침이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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