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양말 없이 차가운 발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애초부터 나는 수면 양말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발 끝의 이불을 말아서 발을 감싸고 있었지만, 차가운 발이 느껴졌다. '차라리 죽어버렸다면.' 너무한 생각이지만, 누군가 헤어진 연인이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걸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너무하잖아, 그건. 이라고 말했으면서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해버린 거였다.

 


죽은 사람이라면 꿈에서 만나도 되는 거잖아. 꿈에서 "너무 바보 같아."라고 너에게 말해도 되는 거잖아. 나는 계속 꿈을 꾸면서 너를 만나려고 해도 되는 거잖아. 

 


그 후로 나는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현실감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그 후로 몇 번의 비가 내렸지만, 어떤 비도 내 마음을 후련히 씻어내릴 만큼 개운하지 않았다. 역시나 현실감이 없는 빗방울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째서 지금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다. 초콜렛도 잔뜩 먹어 두었고,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혼자 있으면서도 쓸쓸해하거나 외롭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어째서 결코 내 방식대로는 친절하지 않은 너로 인해 눈물이 나는 것인지 네가 이 세상에 없다면 이 시간에 차가운 발 때문에 수면 양말을 떠올리지도 않았을 텐데,내일 아침엔 눈이 퉁퉁 붓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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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게 느껴져도
남을 통해서 그 외로움을 희석시키지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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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창에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가방 안을 더듬기 시작했다, 언젠가 챙겨 넣어 두었던 우산이 손 끝에 닿고서야 안심했다. 길다란 우산만 가득한 내 우산 리스트에, 손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우산을 하나 챙겨줬던 애인씨. 맑은 날의 하늘 색을 닮은 우산을 꼭 쥐었다.

 

두둑두둑. 빗방울들이 금세 굵어지고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버스 창을 열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시원했다.그리고 뚝 하고 한 방울. 내 볼에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버스 앞 자리에는 연인들이 다정하게 앉아있다.
불편해 보이지 않는 자세.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여자의 몸은 딱 맞아 보였다.

 

그렇게 딱 맞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애인씨와 나의 모습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딱 맞는 다정한 연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싶어 씨익 웃어버렸다.

 

뭔가 딱 맞아.
다리를 포개어 있을 때도
팔베개를 하거나 해줄 때도
애인씨와 나는 서로에게 딱 맞는 퍼즐처럼 맞춰지는 느낌이라 행복해하곤 했다.

 

애인씨가 날 데려다 주던 그 버스에서.
나는 쓸쓸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다정한 연인은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렇게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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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bucks에 앉아있다.
스타벅스에 들어오면서 날 위한 아늑한 소파자리가 남아 있을 거라 기대 하지 않았지만
딱딱한 의자뿐인 걸 확인하니 막상 서운하고 당혹스러웠다.
(막 전신 교정을 받고 온 나의 엉덩이는 푹신함을 원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처럼 수다소리가 웅웅거리며 가게 안을 휘감으며 시끄러운 곳은
집중력이 높지 않은 나에게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혹은 혼자 책을 읽기 적당한 장소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타일이 아닌 곳에 들어오다니.


칼로리를 어찌 소비하려고 플레인 치즈케익까지 주문했다.
그 모든 것이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일인데
취소된 약속 탓일까?
나는 사회적 인간이기에 이해심 많은 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붕 떠버린 시간을 어찌 채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경제 사정으로 미루어 분명치 사치에 속하는 6,600원 치의 주문을 하고.
그곳에 혼자 온 사람들 머리 수를 더 해주었다.
 
 
SATC의 언니들 말처럼
Starfucks가 전 지구 곳곳에 들어섰다면
그곳으로 위로 받으러 갔을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외로운 게 맞는 것 같다.
 
끊임없이 카페에 앉아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열정적이었다는 증거를 찾기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 일들을 미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그 속에 훌륭하게 빠져 위로 받기는커녕
오히려 억누르고 있었던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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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바닥을 타닥타닥 두들기는 빗소리. 나는 방 안의 온도를 높인다. 불안해져서 질근질근 깨무는 손톱, 입술도 물어뜯어버렸다. 피맛이 쓰다.

아침부터 예민했다. 친구에게 입이 걸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거침없이 못된 말을 내뱉으면서 내가 왜 이러지 싶었다.

예정일보다 며칠 일찍 마법에 걸렸다. 수업을 하다가 애들한테 짜증도 내버렸다. 그런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가 어렸을 때 급변하는 엄마의 성격에 질려버려 '난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똑같아지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진통제를 사먹고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아디다스 드래곤 레이디를 사기 위해 여섯 군데의 매장을 돌았는데 마지막 매장에서야 내가 찾는 색깔은 진품이 아니라고 말해줬다. 진작 알았다면 첫 번째 아디다스 매장에서 나오다 들린 퍼퓸 매장의 디젤 핑크색 운동화를 고민 없이 샀을 것이다. 허탕치고 집에 돌아와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진통제의 효과지속시간이 다 된 것인지 다시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배를 따뜻하게 해주어야지 생각하고 보일러를 틀어놓고 <아이즈 와이즈 샷>에서 니콜 키드먼이 대마초를 피우고 팬티바람으로 화를 내다, 어이없어 웃는 장면을 다시 보고, 채널을 돌리다 <명동백작>에서 전혜린이 죽기 전날 쓴 시를 듣고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전혜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젊은 나이에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뿐인데 그녀가 읊는 마지막 시가 불편해서 그냥 넘어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했다는 보들레르의 시.


 

취하게 하라. 언제나 너희는 취해 있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의 문제다.
너희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너희를 지상으로 누르고 있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너희들은 여지없이 취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취하는가?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그건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취하기만 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나
당신 방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취기가 이미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울부짓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몇 시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주겠지.

"취할 시간이다! 시간에 구애 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노상 취해 있으라.!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들었던 스터디그룹의 이름이 보들레르의 저 시에서 딴 <술.시.덕>이었고 그곳에서 나만, 어느 것 하나에도 취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배에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입술도 파랗게 변해갔다.

 

 

 

친하다는 사람들 몇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안 좋다 어디 아프냐? 라고 말하는 몇 명에게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넘겼고 그네들에게 아프다고 말하는 건 참 지겹고 지겨운 레파토리 들려주는 것과 같아 차마 솔직하게 말을 못하겠더라.몇 명이랑은 쓰잘데기 없는 농만 주고받다 전화를 끊었다. '나 너무 아픈데 좀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거려주면 안돼.' 그것을 원하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몇에겐 회신률이 낮은 토요일 밤의 문자를 날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역시나 기대가 무너지고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멀티 메세지를 하나 받았다. 그때부터 눈물이 주루륵 흐르더니 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나의 예민함. 나의 게으름. 나의 외로움. 나의 몹쓸 기대감. 나의 아픔
이런 것들은 결국엔 어느 누구도 알아줄 수 없는 나만의 것인데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실망하는 내가 불쌍해서 한참을 울었다. 울다가 너무 아파서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할 정도로 울고 있었다.






모든 건 내가 안고 가야 할 나의 몫인데 가끔씩 버거워할 때가 있다.
아무도 몰라줘서 야속하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바라는 다정함이라는 건 가망 없는 세상에 살기에 건조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까?

 

나는 지금 이 순간 드는 분노를 엉뚱하게 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끄적거리면 조금 위안이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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