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은 구세계에>


“성장하면 이별한다. 헤어지는 사람들은 문제가 아니다.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문제이다.” 구남친과 얽혀 엉망진창인 감정 상태로 나 자신을 소모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에 친구가 해준 말이었다. 그와 끝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장하면 이별한다는 말의 의미를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에게서 완벽하게 벗어 나서야 그 말을 이해했다. 정체된 나, 과거 속에 사는 나, 현실을 부정하는 나를 버리고 한 발을 겨우 내딛고 나서야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되고 그와의 이별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와 영원을 바랐던 시간이 있었다. 내 미래에 그릴 때 그가 함께인 것은 당연했고 그것만이 완벽한 모습이라고 믿었다. 그런 탓에 그와의 이별은 지지부진했다. 단칼에 잘려나가지 않았다. 단호해지지 못했다. 그를 끊어내는 것은 나의 일부를 산산조각 내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갑해졌다. 마치 아주 조금 자란 탓에 이전의 틀이 옥죄인다고 느꼈다. 이대론 안돼. 허물을 벗듯 내게서 그를 벗겨냈다.  


이별을 겪은 뒤 새로운 사람과 친밀해지는 과정은 피곤하기만 했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 있어주길 바라는 밤은 매일 찾아왔다.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내고 홀로 누워있으면 이 견디기 힘든 쓸쓸함을 위로 받고 싶어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밤의 시간, 타인의 체온이 필요해지는 외롭고도 야릇한 그런 밤. ‘날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있었지. 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눈길이 있었지.’ 그런 날이면 한때는 영혼이 이어져 있었다 믿었던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도 비슷한 주기를 가지다니, 그래서 연인이었던 것이라고 그 순간의 진실에 몰입했다. 우리 둘만 아는 뉘앙스로 그에게 원하는 신호를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관계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그 모양이 변하기 마련인데 처음 그 모습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둘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편안함을 권태롭게 여겼다. ‘열정’이 사그라진 관계를 사랑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에게 이별을 선언한 건 나였지만 서로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어져서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관계의 무게를 덜어낸 상태에서 여전히 친구처럼 지내길 바랐다. 그런 탓에 약해질 때면 나도 그를 찾곤 했고, 그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었다. 사귈 때보다 수월하게 내가 바라는 것이 얻어졌다. 그런 탓에 습관처럼 굳어져가고 있었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처럼 그에게 안겨 기만스러운 만족감에 취했다. 


서로에게 연인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그에게 얽매여 있는 내가 그 감정을 품은 채 새로운 사람에게 빠져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홀로 튼튼해질 필요가 있었다. 단순한 외로움을 타인을 통해 해소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다. 이미 헤어진 연인과 나누는 섹스는 아슬아슬한 미봉책일 뿐이었다.

 

사태는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생겼고 나에게 그 사실을 함구한 채로 나를 찾았다. 어리석게도 선을 긋지 못한 나는 자기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야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니까 나를 찾는 거잖아. 진짜 서로 잘 통하고 함께 있을 때 좋은 건 나라는 걸 의미하는 거야.’ 이런 멍청한 생각으로 무장해서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순식간에 형편없는 놈으로 전락시킨 것도 나 자신이었다. 스스로 위악적으로 굴며 완전히 망가진 관계 안에서 절대 괜찮을 리 없는 자신에게 ‘나는 괜찮아’를 되뇌었다. 동물적 욕구에 굴복해버리고 난 다음날 쓰나미처럼 밀려올 자괴감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하지 않은 채 그 순간의 즐거움과 따스함의 강렬함에 취했다. 


그렇게 애매한 관계와 상태를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처음 몇 번은 친구들에게 ‘그가 나를 찾아왔어. 나를 잊지 못했나 봐. 어쩌다 보니 같이 자게 되었는데 그래도 괜찮아. 끝난 사이니까. 되돌릴 건 아니야.’ 라며 허세부리듯 말했지만 결코 괜찮지 않았고 그 일을 자주 반복되었다. 나의 필요, 그의 필요들이 만들어낸 이 기간 동안 자제력이 없는 무너진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자존감도 같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나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까지 내려와서야 바닥을 실감했다. 그는 과거였다. 다시 두 사람이 잘 될 일도 없었다. 이 현재가 미래로 이어질 일이 없었다. 속정만 남은 과거의 연을 끊어 낼 때 비로소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의 세계를 종결 짓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닫는 일이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와 그를 직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대로 본다는 건 아프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과거를 끊어내고 홀로 설 때 더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서 주변의 기운들이 거짓말처럼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폐쇄시킨 과거의 세계가 다시금 내게 달려드는 일은 온 힘을 다해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거의 연인 때문에 감상에 젖어 드는 것은 어리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제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과거는 과거다. 구남친은 구세계에. 그가 내게 돌아올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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