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나서 상처와 공허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섹스 혹은 불능을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다.

평론가들의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다. 같은 남자로서 브랜든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 같은 걸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 였는데 흥미로운 글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브랜든 같은 남자를 세 명 정도 알고 지냈는데

(영화로 보면 한 명도 놀라울 것 같지? 하지만 그런 부류의 남자들은 널려있다.)

 

그런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글렌 굴드의 음악을 쓰는 게 아깝고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력이 낭비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정말이지 지나치게 감각적이다.

숨이 막히고 갑갑하고 브랜든의 고통을 절절히 관객도 느끼게 만든다.

결코 야하지 않은 섹스는 슬프고

관계를 보여줄 땐 언제나 긴장감과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팽팽해서 조금만 더 당기면 끊어져버릴 것 같이 불안하다.

그렇게 브랜든의 감정을 치장해주기 바쁘다.

 

 

영화는 브랜든에 초점이 맞춰져있지만

씨씨를 통해서 브랜든을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글에선 그 둘을 근친상간의 이미지로 보고 있는데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내게는 좀 불편했다.

 

갈망하지만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만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단순하지 않은가

그 정도의 갈망이라면 여동생 씨씨 대신 원수 집안의 딸이 첫사랑이라든지.. 라는 다른 과한 설정으로도 가능하잖아.

 

We're not bad people...we just come from a bad place

 

사실 그 한 줄 대사면 충분했다.

구구절절 사연들을 덧붙이는 건 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절망스러운 까닭은

브랜든의 공허 때문이 아니라

 

죄의식을 자극하는 타인이 곁에 있어야만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만. 알면서도 변하지 않을 '나'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비난의 말을 쏟아내지만

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임을

그리하여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깨닫는 순간 희망은 없는거다.

(외설 잡지와 자위도구, 포르노가 가득한 랩탑을 버린다 한들)

 

마지막 장면에서 <인셉션>의 팽이처럼 열어놓은 결말 속에

이번에도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스스로 선택해야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지 않는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자기 상처만 크게 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 특히 자신을 위장할 수 있는 영리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은 결코 나아질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마음없는 섹스를 하고 이런 건 하나도 문제될 게 없다.

그건 삶의 방식이다.

사실 브랜든은 어떤 남자들보다 매력적이고, 본능적이다. 동시에 그 동물 같은 면 속에서 대단히 매너있게 여자를 대한다.

돈을 주고 사는 여자나 하룻밤을 위해 우연히 만난 여자이거나 그녀에게 브랜든은 안전하고 깔끔한 상대인 것이다.

사랑을 말하며 무례한 남자들보다 그런 게 훨씬 더 나은 점이 있다는 거다.

자극적이고 소재적인 섹스중독 자체는 <셰임>이라는 영화 안에서 특별히 부끄러울 게 없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섹스중독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돌볼 줄 모르는 그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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